피로스가 스파르타의 내분에 뒤이어 아르고스에서의 내란에까지 간여하다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제때 발을 빼지 못했던 탓이 컸다. 무엇보다도 뼈아팠던 실책은 그가 어쩌면 마케도니아의 왕이 될 수도 있었을 절호의 기회를 포기한 일이었다. 왜냐면 ‘천둥‘이라는 별명을 지녔던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가 갈리아족과 싸우다가 피살되고, 이 여파로 인해 마케도니아군 또한 풍비박산이 나면서 마케도니아 왕국에 권력의 공백상태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피로스가 이때 그리스로 귀환했다고 하여 그가 자신의 오랜 숙원이기도 했던 마케도니아의 지배자가 되는 꿈을 실현시킬 수 있었으리라고는 물론 장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그리겐툼, 시라쿠사, 레온티니 세 도시에서 파견된 사절단의 제안에 마음이 동한 까닭에 시칠리아로 떠난 선택은 두고두고 땅을 치며 후회해야 마땅할 결정적 오판이었다는 점이다.
시칠리아 섬에서 피로스는 명불허전의 무용을 역시나 과시했다. 여느 때처럼 제일 먼저 성벽에 기어 올라가 상처 하나 입지 않고서 무수한 적병을 살상시켰다. 그런데 역시나 그곳에서도 새로운 희망과 계획이 생기면 그 즉시 원래의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리곤 하는, 가히 ‘자발적 기억상실증’이라고 진단해야만 할 고질적 악습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시라쿠사에서의 초반 성과에 고무된 나머지 카르타고 본토마저도 아예 통째로 차지하고 말겠다는 당찬 목표를 새롭게 세운 것이다. 시칠리아 안의 카르타고 주둔군과 친카르타고 세력을 일소해 달라는 시칠리아인들과의 당초 계약조건을 한참 뛰어넘는 무리한 발상이었다.
카르타고 정복을 꾀하게 된 피루스는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들로부터 그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강압적으로 징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늑대를 쫓아내려다 호랑이를 들어앉힌 꼴이 된 시칠리아인들의 반감과 저항을 부른 것은 당연했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건설된 그리스인의 식민도시들을 로마군의 공격으로부터 구원한다는 구실을 명분 삼아 “로마인들과 카르타고인들에게 좋은 싸움터를 남겨주고 가는구나”라는 나름 뒤끝 있는 발언을 사서에 남기며 시칠리아 섬에서 물러난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미래를 정확히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피로스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치열했던 포에니 전쟁의 막이 오른다.
피로스의 중대한 문제점은 지나치게 미래지향적이었다는 데 있었다. 그에게는 장래에 대하여 너무나 큰 포부를 품는지라 역설적으로 현재를 등한시하는 뿌리 깊은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애써 얻은 것도 더 큰 욕심을 부리다가 허투루 잃기 일쑤였다. 대국만 좇느라 실리는 놓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늘 숲만 바라보기에 정작 숲 속에 어떤 유용한 나무들이 서식하고 있는지를 몰랐다. 장기판에서 차는 멋지고 화려하게 잘 쓰지만, 졸을 이용해 상대를 질식시킬 지경으로 밀도 높게 압박하지는 못한다는 후세 역사가의 평가가 딱 들어맞았다.
피로스가 서양이 아닌 동양에서 활약했다면 그는 분명히 “역마살이 끼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야말로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역마살 끼었다는 표현 이상으로 그의 성정과 동선을 정확히 묘사해줄 문장이 드문 이유에서다.
한 곳에 진득하게 정착해 착실하게 세력을 키우지 못하는 피로스의 특이한 체질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을까? 첫 번째 원인은 환경적 요소에서 찾을 수가 있으리라. 그의 아버지인 아이아키데스 왕이 몰로시아인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살해되자 피로스는 후삼국시대의 궁예처럼 유모의 품에 안겨 이웃나라인 일리리아의 왕 글라우키아스에게 보내짐으로써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피로스가 열두 살의 나이에 고국으로 돌아와 왕좌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글라우키아스 덕분이었다.
소년왕 피로스는 강보에 휩싸여 도망친 사건만 궁예와 흡사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에게는 미륵을 자처한 궁예처럼 민중을 홀리는 독특한 재주가 있었다. 오른쪽 발로 환자들의 아픈 곳을 살며시 지그시 눌러 병을 고쳐주는 영험한 능력을 가졌던 것이다. 피로스가 완치된 병자들에게 치료비로 요구한 대가라고는 제사에 쓰일 수탉 한 마리뿐이었다고 전한다.
피로스가 왕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인자하고 지혜로운 성군으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요절 후에 음모와 전란으로 소용돌이쳐온 그리스 세계와 발칸반도 지역의 정세는 그러한 발전경로를 원천봉쇄하고 말았다. 그가 17세가 되던 해에 발생한 쿠데타가 그를 전도유망한 소년 군주에서 무일푼의 알거지 신세로 일거에 영락시킨 때문이었다. 그가 에피루스로 다시 돌아와 권력을 한 번 더 되찾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집트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의 공로와 역할이 지대했다. 그의 부인인 안티고네는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왕비였던 베레니케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소생이었다.
이와 같이 지중해 유역 도처에 족적을 찍으며 파란만장한 유년시절과 우여곡절로 점철된 청년시기를 보낸 피로스에게 역마살이 끼지 않으면 그게 되레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의 입장에서는 “밖에 나가야 뭔가 생긴다”는 경험칙을 신봉할 수밖에 없기 마련이었다.
두 번째 원인은 피로스가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의 용기는 잇따른 불운에도 꺾이지 않았고, 중년에 접어든 피로스가 자기를 조롱하는 건장한 적장의 몸통을 삼국지의 여포처럼 단칼에 두 동강 낸 일화가 증명하듯이 그의 무예는 세월의 흐름에도 전혀 녹슬지 않았다. 지략과 경륜에서도 당대 최고였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단기적으로는 어떤 의도건 비교적 쉽사리 관철시킬 수 있었다. 내일도 오늘같이 좋으리라는 안일한 계산과 과도한 낙관론에 빠지기 쉬운 상황이 피로스 주변에서 항시 벌어져왔던 셈이다.
마지막 전장이었던 아르고스에서도 그는 휘하 군대의 제일 앞줄에서 미친 듯이 싸웠다. 적군과 아군이 마구 뒤섞이고, 사람과 짐승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극도의 난전이었다. 이 혼전 속에서 피로스는 한 평범한 노파가 지붕 위에서 던진 기왓장에 머리를 맞아 그 충격으로 척추가 부러진다. 등뼈가 으스러진 피로스임에도 그를 둘러싼 적병들은 분노와 원망 가득한 피로스의 눈초리가 무서워 벌벌 떨면서 그의 목을 베었다고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기록하고 있다. 절대무공의 보유자 피로스에게 닥친 허망하면서서 비극적 최후는 그로부터 수십 년 후에 지구 반대편에서 역발산기개세를 뽐내던 초패왕 항우의 죽음을 통해 비슷하게 재연된다.
나는 피로스의 육체의 척추는 아르고스에서 부러졌으나, 그의 운명의 척추는 이탈리아에서 부러졌다고 해석하는 시각이 타당할 것이라 믿는다. 무능한 자의 잘못된 선택은 몇몇 사람의 인생에만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유능한 자의 그릇된 판단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간들의 삶의 진로를 나쁜 방향으로 바꿔놓는 법이다. 로마군 사령부가 내려다보이는 군막에서 아드리아 해를 건너는 대신 메시나 해협을 건너가기로 결심한 피로스의 치명적인 선택처럼.
☞ 「플루타르크 영웅전」 읽기 모임은 새해인 2015년부터 매주 수요일에 진행됩니다. 신년 첫 모임인 1월 7일 수요일 저녁에는 고대 그리스의 백미라 할 아테네의 창건자인 ‘테세우스’를 한 번 더 공부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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