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크 영웅전

② 피로스의 범증 키네아스

공희준 2014. 12. 17. 01:38

「플루타르크 영웅전」과 「사기(史記)」의 두드러진 차이점을 한 가지만 꼽아보라고 하면 전자는 개인전의 성격을 띠고, 후자는 단체전의 양상을 연출한다는 데 있다. 플루타르코스의 책에 등장하는 군웅들은 탁월한 개인기를 앞세워 야심의 실현을 꾀하고, 사마천의 붓끝으로 나타나는 인물들은 용인술의 유무, 곧 인재를 잘 쓰거나 잘못 쓰는 데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린다.


바로 이런 까닭에 피로스에 관한 부분을 읽어 내려가면 사기를 접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기 쉽다. 왜냐면 피로스를 훌륭하게 보필한 한 탁월한 책사의 행적과 활동상이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 이유에서이다.


키네아스의 고향은 테살리아였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피로스의 근거지인 에피루스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처럼 보이지만, 조그마한 도시 하나가 한 국가를 이뤘던 고대 그리스 세계의 특질을 염두에 둔다면 키네아스는 타국 출신으로 벼슬을 하는 신하를 뜻하는 객경(客卿) 신분이었다. 당연히 오랜 토박이들로 구성된 토착세력으로부터 집요한 견제를 받았으리라. 그럼에도 피로스가 그를 깊이 신뢰한 사실로 유추해보건대 상당한 능력자였음이 틀림없다.


키네아스의 실력은 피로스의 입을 통해 생생히 증언된다. 피로스는 자기가 칼로 정복한 도시의 숫자보다도 키네아스의 혀로 함락된 도시들의 개수가 더 많다고 흔쾌히 인정했던 것이다. 피로스의 궁정에 출사하기 전에 키네아스는 당대를 대표하는 웅변가라 할 데모스테네스의 제자였었다.


피로스는 키네아스의 말솜씨는 존중하고 호평했으되 그의 신중함과 심모원려는 배우고 본받으려 하지 않았다. 키네아스는 전쟁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간주하고 싸움터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피로스에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에 빗대어 평화적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려고 힘을 쏟지만, 그에게는 키네아스의 끈질긴 설득을 받아들일 의사도, 지혜도 없었다.


연전연승을 거두며 언제나 이기는 상승장군의 명성을 굳혀온 피로스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서 로마군에게 덜컥 발목이 잡히고 만다. 베트남의 정글에서 수렁에 빠진 미군과 비슷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주로 게릴라전에 의존해야만 하는 월맹군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정규전에서도 전략과 병력과 보급의 모든 측면에서 적군에게 전연 꿀릴 것이 없는 거대한 규모의 잘 조직된 강군이었다. 그즈음의 피로스의 입장은 비유하자면 미국을 침공한답시고 겁 없이 플로리다 반도에 무모하게 상륙한 베트콩의 처지에 오히려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키네아스가 현학적인 철학 토론의 무대를 빌려서 로마 측의 협상 대표인 파브리키우스를 구워삶으려고 시도했다는 일화는 앞서 소개한 바가 있다. 그가 파브리키우스의 상대역으로 낙점된 것은 키네아스가 그리스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로마의 장단점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리스를 낱낱이 연구하는 로마인은 수두룩했어도, 로마를 샅샅이 조사해본 그리스인은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던지라 키네아스에게만은 남모를 ‘촉’이 왔던 것이다.


휴전협정 체결을 성사시키려는 목적으로 키네아스가 로마에 머물렀던 시간이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그의 생물연도처럼 이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피로스와 로마의 전쟁이 수년간 지속되었던 터라 며칠 정도의 단기 체류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키네아스로서는 로마의 허실과 로마인의 명암을 꼼꼼하고 차분하게 관찰할 물리적․심리적 여유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던 셈이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키네아스는 로마를 방문한 동안 로마인들의 생활양식을 예의주시하면서 로마의 통치체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로마의 엘리트들과의 소통과 교류 또한 체계적이면서도 주도면밀하게 진행했을 걸로 사료된다. 그 후 피로스의 본영으로 돌아온 키네아스는 자신이 로마 공화정의 심장부에서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바를 주군에게 성심성의껏 자세히 설명하였다.


키네아스가 피로스에게 제출했을 장문의 보고서가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 것을 나는 너무나 아쉽게 여긴다. 키네아스의 기록은 토크빌이 신생국가의 티를 여전히 벗지 못한 19세기 전반의 미국을 장기간 여행하면서 남긴 「미국의 민주주의」의 원조 격이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토크빌이 생존했을 때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키네아스가 체재한 로마가 그로부터 100년도 채 안 되어 맞수를 불허하는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할 것을 예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


키네아스는 로마의 원로원은 마치 많은 왕들의 집회 같이 보였으며, 로마인들은 히드라처럼 하나를 무찌르면 둘이 되어 덤빈다고 진단했다. 지금 생각하면 누구나 할 법할 하나마나한 분석으로 들리겠지만, 당시까지 인류가 쌓아온 정보의 총량과 축적된 지식의 크기가 극도로 제한적이었을 BC 3세기 초엽 무렵의 시대상황 아래에서는 놀라운 선견지명이었다. 키네아스는 로마는 거의 무진장한 인적 자원을 보유한 나라이므로 피로스가 싸워서 이기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중에 일본 연합함대의 사령관을 지낸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주미 일본 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도출했던 결론과 유사한 대목이다. 야마모토는 미국의 압도적 물량을 일본이 결코 당해낼 수 없으리라고 본국에 타전하였다. 우리민족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가 보낸 의견은 일본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철저히 묵살당하고 말았다.


이탈리아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벗어난 피로스에 앞서서 3천 명의 병사를 스스로 인솔하고 선봉대로 타렌툼에 미리 도착해 있었던 데에서 보이듯이 키네아스는 머리와 입만으로 싸우는 책상물림형의 참모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피로스는 키네아스를 등용할 수 있었던 것이 본인에게는 커다란 영광이었다고 고백했다. 키네아스는 어쩌면 일개 막료를 넘어서 피로스의 멘토이자 해결사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키네아스의 충직하고 헌신적인 보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을 오가며 전개된 6년간의 원정은 피로스에게 어떠한 실질적 소득도 안기지 못했다, 그에게 남은 자산이라고는 당찬 포부를 품고 이탈리아로 왔을 때와 견줘 질도, 양도 크게 감퇴한 지치고 배고픈, 게다가 급료마저 밀린 상처투성이의 군대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통 크고 관대했던 그의 성정은 의심 많고 시기심 가득한 용렬한 소인배 근성으로 변질되고 만다.


피로스의 에피루스 귀환과 더불어 키네아스는 역사의 무대에서 종적을 감춘다. 피로스와 결별한 때문인지, 아니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탓이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단지 확실한 사실은 그리스의 맹주가 되고, 더 나아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겠다는 피로스의 원대한 꿈과 야망은 키네아스의 퇴장과 함께 영원히 물거품이 되었다는 점이다. 범증을 떠나보냄으로써 천하를 쥘 가능성까지도 영영 잃어버린 초패왕 항우처럼, 이후의 피로스의 삶은 단순한 생존투쟁 차원의 의미 없는 개인전으로 점철되고 말았다.


☞ 「플루타르크 영웅전」 읽기 모임의 시간이 2015년 1월부터 종전의 매주 목요일에서 수요일로 변경됩니다. 단, 장소는 변동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