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같이 나타난 촉망받는 청년 정치인이기는 했으되 초라한 집안 출신에 학식도 시원치 않은 마리우스에게 카이사르 집안의 귀한 딸자식이 시집을 온 데에는 그의 소문난 참을성이 큰 역할을 했다. 마취제도, 진통제도 없던 시대에 몸을 결박하지도 않고서 다리 깊숙이 들어찬 종기를 여유 있게 긁어낸 일은 그가 얼마나 참을성이 강한 사나이인지를 일러주는 대표적 일화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명의 화타가 명장 관우를 치료하는 과정을 마리우스는 거의 실사판으로 보여줬다고 할밖에.
사실 마리우스에게는 카이사르 집안과 인척관계를 맺기 이전에도 비빌 언덕을 마련할 기회가 있었다. 문제는 그 비빌 뻔했던 언덕과 그가 다시는 상종 못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는 점이다.
현재의 알제리 북부 지방에 자리했던 누미디아 왕국의 국왕 유구르타가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자 집정관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마리우스를 부관으로 발탁한 다음 진압군을 편성해 현지로 출동했다. 마리우스는 이 전쟁에서도 변함없는 용맹함과 쉬지 않는 솔선수범으로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총사령관 메텔루스는 마리우스의 인기 몰이를 군의 기강과 단합을 해치는 지나치고 이기적인 개인플레이로 생각했던 듯싶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관계를 파탄시킨 결정적 사건은 메텔루스와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사이이자 공병대장으로 출진한 투르필리우스의 신병 처리에 관한 일이었다. 유구르타 군에게 사로잡힌 투르필리우스가 조국을 배신했다는 혐의를 받고 처형됐는데, 후에 그의 무죄가 밝혀지자 재판이 진행될 당시에는 엄벌을 촉구했던 마리우스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친구를 사형시킨 메텔루스를 적반하장 격으로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나섰던 것이다. 모욕감을 느낀 메텔루스는 마리우스를 아직은 소년에 지나지 않는 자기의 아들과 동급의 인물로 깎아내리면서, 집정관 선거에 입후보한 마리우스가 선거를 불과 12일 앞두고서야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는 식으로 선거운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였다.
메텔루스의 집요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표차로 집정관에 당선된 마리우스는 메텔루스가 무능한 탓으로 전쟁을 질질 끌고 있다고 주장하며 조속한 승전을 시민들에게 약속했다. 배은망덕한 마리우스와 복수심에 눈먼 메텔루스 가문의 악연은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카이사르가 이끌던 군대가 메텔루스 가문의 마지막 실력자라고 할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서력으로 기원전 47년에 북아프리카의 탑수스 전투에서 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대단원의 마침표가 찍히게 된다.
이는 아주 나중의 일이니 본론으로 되돌아가보자. 빠른 시일 안에 반란의 수괴 유구르타를 사살 또는 생포하겠다고 엄숙히 공약한 마리우스는 로마 역사에서 분수령을 이룰 아주 중요한 군사적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종전의 법률과 관습을 깡그리 무시하고서 빈자와 노예들을 군사로 모집했던 것이다. 기존에는 일정 정도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만이 군복무를 할 수 있었는데, 그러한 자격요건을 사실상 없애버린 것이다. 쉽게 말해서 병역제도의 근간을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하는 단초를 열었다고 하겠다.
플루타르코스는 마리우스가 오만불손한 언사로 귀족들을 수시로 모독함으로써 귀족층의 반감을 의도적으로 자초했다고 비판하면서, 귀족들을 겨냥한 마리우스의 잦은 독설과 막말이 평민층의 호감을 사기 위한 일종의 선동선전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플루타르코스의 지적처럼 언어의 힘으로 상대를 자극하고 압박할 단계에 이르렀다면 이즈음의 마리우스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눌변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치열한 노력의 결과로 뛰어난 웅변가로 발돋움한 것으로 보인다.
무능한 메텔루스와 달리 신속한 승리를 거두겠다던 마리우스의 대국민 공약은 미처 제대로 검증될 틈조차 없이 유야무야되고 만다. 그가 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쟁이 끝나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우스가 누미디아에서 맞닥뜨린 적은 유구르타의 강력한 기병대가 아니었다. 그는 그보다 더 다루기 힘든 상대와 맞부딪쳐야만 했다. 마리우스의 생전에는 결코 토벌되지 않을 메텔루스 가문의 분노와 시기심이 이빨을 번득이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에서였다.
메텔루스 일족의 분노와 시기심만이 그를 노렸다면 마리우스는 나중에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권력의지와 상대에 대한 투쟁심에서만큼은 마리우스보다도 더 마리우스 같았던 또 하나의 강적 술라가 발톱을 날카롭게 기르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파의 수장 마리우스의 세력과, 귀족파의 거두인 술라 진영 간의 경쟁이야말로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로마를 질펀한 피바다로 만든 핵심적 원인이었다.
로마를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은 마리우스와 술라의 불화의 시작은 마리우스를 술라가 그대로 모방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마리우스가 누미디아 전쟁의 승리의 업적을 메텔루스한테서 파렴치하게 가로챘듯이, 술라는 유구르타를 사로잡은 공로를 마리우스에게서 뻔뻔스럽게 빼앗아갔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메텔루스 가문과 술라 일파의 협공을 받고 정치적 궁지에 몰린 마리우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 주인공은 역시나 이번에도 전쟁이었다. 테우토네스족과 킴브리족이 이탈리아 북부로 메뚜기떼처럼 몰려온 것이다. 양 부족을 모두 합치면 전투 병력만 무려 30만 명에 달한다는 대규모 인원이었다. 다른 일은 몰라도 전쟁에서만은 “구관이 명관”이라는 심리가 유권자들 사이에 발동된 덕분인지 마리우스는 로마에 없었음에도 또다시 집정관에 뽑혔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부분은 엄청난 외형적 숫자에도 불구하고 회색 눈과 거대한 체구로 인해 게르만족으로 짐작되는 테우토네스족과 킴브리족이 과연 실제로 로마를 함락시킬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느냐는 점이다. 전투원만 30만이라는 소리는 칼과 창을 손에 들 수 있는 건장한 남성들이 그쯤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칼과 창을 손에 들 수 있느냐는 것과, 그것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과, 창과 칼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기동시킬 수 있느냐는 것은 전혀 별개 차원의 사안인 것이다.
집정관으로 다시금 선출된 마리우스는 유구르타를 살아있는 제물 삼아 로마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한다. 수치심과 감옥에서의 학대로 마음도, 몸도 무너진 비운의 영웅 유구르타는 마리우스의 전승을 축하하는 개선식이 지나고 엿새 만에 파란만장하면서도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만다.
마리우스는 특유의 맹훈련과 가혹한 군기로 휘하의 병사들을 ‘마리우스의 노새’라고 불릴 정도의 규율 잡힌 정예의 강군으로 조련해냈다. 그는 자신의 조카인 카이우스 루시우스의 성적 학대를 못 견디고 그를 살해한 한 어린 병사를 정당방위로 풀어줌으로써 공정함과 고결함의 명성을 가일층 높여나갔다. 마리우스는 무기의 개량에도 힘써서 로마군이 그때까지 전장에서 사용해오던 창을 적의 방패를 더욱더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구조로 변환시켰다.
따라서 BC 102년에는 테우토네스족을, 다음해에는 킴브리족을 손쉽게 각개격파하고 앞의 전투에서 10만 명이 넘는, 뒤의 싸움에서 6만 명 이상의 게르만족 남녀들을 각각 포로로 만든 것은 전혀 놀랄 일도,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여기에서 붙잡힌 게르만인 포로들은 로마인들의 편의와 쾌락을 위한 말하는 짐승, 곧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음은 물론이다. 패배한 게르만족의 왕들은 알프스 산맥을 통해 북쪽으로 도망치다가 2,000년 후의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처럼 예상 도주로를 지키고 있던 적병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마리우스는 두 게르만 부족을 격파해나가는 중에 연거푸 집정관에 선출되어 무려 다섯 차례나 집정관에 오른 인물로 기록된다. 군사적 승리가 정치적 승리로 이어졌던 셈이다. 잇따른 승승장구에 기분이 좋아진 때문이었는지 마리우스는 인색함으로 일관하던 평소의 그답지 않게 승리의 영광을 동료 집정관 카툴루스와 함께 기꺼이 나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걸 두고 홀로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으스대면 마리우스의 군대 못지않게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린 카툴루스의 병사들이 개선식에서 행패를 부릴까 봐 조바심이 난 마리우스의 방어적 행동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허나 이 무렵의 마리우스는 장병 몇 명이 그까짓 잔칫상 몇 개쯤 뒤엎는 일을 걱정하기에는 대단히 잘나가고 있었다. 여섯 번째로 집정관직에 도전하는 관록의 노련한 정치가인 만큼 이제는 그 또한 통 큰 모습을 보여줄 때도 되었던 것이다.
☞ 「플루타르크 영웅전」 읽기 모임의 이번 주제는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입니다. 시간과 장소는 1월 14일 수요일 저녁 7시 가회동 주민센터 건너편 북촌학당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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