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크 영웅전

공화국을 끝장낸 평민 정치인 가이우스 마리우스 ①

공희준 2015. 1. 9. 18:03

가이우스 마리우스(BC 157~86)의 삶을 설명하는 일에서 첫 번째로 소개해야 할 사실은 그가 무려 7번에 걸쳐 집정관에 선출되었다는 점이다. 로마를 갈리아인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킨 카밀루스가 단 한 번도 집정관을 지내지 못한 것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집정관 경력의 유무에 못잖게 특기할 사항은 카밀루스가 로마 공화국을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데 반해서, 마리우스는 그의 본의가 뭐였든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길을 열었다는 데 있다.


공화국 로마가 막을 내리게 되는 대하드라마의 시즌 1의 주연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우스는 귀족 가문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인물이었다. 단적으로 그는 중간에 씨족의 명칭이 들어가 통상적으로 세 단위로 이뤄지는 대부분의 출세한 로마인들과는 달리 ‘Gaius’ ‘Marius’라는 아주 단출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즉 잘난 조상을 가지지 못한 전형적인 평민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마리우스를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평가해놓고 있다. 마리우스가 활동한 시대와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을 집필한 시대 사이에 200년 정도의 간격이 놓여있음을 생각하면 마리우스가 플루타르코스의 부모님의 원수도 아닐진대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기에 그는 마리우스를 왜 그토록 당장 잡아먹을 것처럼 격렬히 성토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플루타르코스의 가슴 속에 망국이 한이 깊고도 오랫동안 서려있었고, 그가 테세우스의 나라가 로물루스의 나라의 식민지 신세로 몰락한 것이 무책임하고 과격한 대중 선동가들이 아테네의 정계를 주도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던 것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마디로 플루타르코스의 눈에 마리우스는 지옥에서 로마로 다시 살아 돌아온 아테네의 사악한 데마고그이자 백해무익한 포퓰리스트로 비쳤던 것이다.


나는 플루타르코스의 이러한 개인적 성향을 염두에 두고서 독자들이 마리우스를 읽어나가길 바란다. 왜냐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도 하거니와, 역사를 써나가는 사관 개인의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마리우스의 생김새를 두고 단도직입적으로 난폭하다고 서슴없이 표현했다. 사진도 없고, 더욱이 현대적 의미의 정밀한 초상화도 없던 때였으므로 마리우스가 대관절 어떤 얼굴이었기에 플루타르코스로부터 다짜고짜 난폭하게 생겨먹었다는 악평을 들었는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마리우스가 문약한 유형의 서생적 인간은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천성이 용맹할뿐더러 그러한 천성을 군사 문제에 대한 관심과 학습으로 더욱더 강단 있게 발전시켰다.


마리우스는 당대 로마 엘리트층에게는 필수 교양으로 여겨진 그리스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로마의 지식층들이 박식함을 뽐내기 위해 사용했던 그리스어도 그는 쓰지 않았다. 않았다기보다는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서술일 게다. 왜냐면 로마인들은 그리스 출신의 해방 노예들이 상당수 그 역할을 담당했던 그리스인 가정교사들로부터 그리스의 문물과 언어를 배웠는데, 성장기의 마리우스는 집에 가정교사를 둘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 인문학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어떻게 못난 노예가 잘난 주인을 지도할 수 있느냐며 거칠게 합리화했다.


마리우스는 날품팔이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고향인 아르피눔 지방의 평범한 촌락을 벗어나 수도 로마의 위용을 실제로 목격하게 된 건 거의 성년기에 도달했을 즈음에서였다. 세상사는 모두 명암이 있고, 일장일단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이를 먹고서야 대처에 나간 것은 마리우스에게 촌놈 딱지를 붙여줬지만, 그와 동시에 선배 로마인들의 자랑스러운 전통적 덕목이었던 절제와 근면을 그에게 선물해주었다. 엎어지면 또 일어나는 오뚝이 같은 그의 근성과 투지는 농촌총각 마리우스가 고향마을에서 보냈던 거칠고 빈한한 삶을 통해 만들어졌다.


소설가 장정일은 가난한 집안의 무죄한 장남에게 적합한 직업으로 은행원을 꼽았다. 마리우스가 청년기에 도달했을 시기에 로마에서 가난한 집안의 성실한 아들들에게 안성맞춤일 직종은 군인의 길을 걷는 것이었으리라. 나머지 식구들 입장에서는 입 하나 덜어내는 효과가 있었고, 아들 본인으로서는 운과 능력이 결합될 경우 고향에서는 바랄 수 없을 출셋길이 마련될 수도 있었다. 마리우스가 바로 이런 사례에 해당했다.


마리우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켈티베리아인들의 저항을 분쇄하며 이베리아 반도의 누만티아(현재의 누만시아)를 공략할 때 용맹을 떨쳤다고 한다. 용맹한 전사들은 드물다. 용맹하면서도 규율 있는 군인은 더 드물다. 마리우스는 전선에서는 적군을 제압하는 사명에서, 진중에서는 엄격한 군율을 확립하는 과제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니, 사치와 오락에 찌들어 무너져가는 군기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해온 스키피오의 눈에 그가 자연스럽게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키피오는 누가 그의 후계자가 될 것 같으냐고 묻는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마리우스를 지목할 정도로 그를 신임하였고, 마리우스는 스키피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유망한 청년에서 로마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하는 대정치가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마리우스가 처음으로 얻은 관직은 호민관이었다. 호민관으로 선출된 마리우스는 집정관 코타를 대담하게 압박해 투표개혁 법안을 인준시킴으로써 평민층의 존경과 신뢰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선박에 관한 법령이 상정되었을 적에는 평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를 반대하여 특정계급의 이익에 치우치지 않고, 공익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싸움이라면 언제든지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평판 또한 손에 쥐게 된다.


그가 다음으로 도전한 관직은 도로와 건물 등의 공공시설의 관리를 책임지는 조영사였다. 마리우스는 두 명의 조영사 가운데 좀 더 높은 직급의 쿠졸레 조영사에 입후보했다 낙선하자, 곧바로 낮은 직급인 평민 조영사에 출마했다가 여기에서도 미끄러지고 말았다. 전례 없이 하루 사이에 두 번이나 선거에서 떨어지는 어마어마한 창피를 당한 것이다.


웬만한 보통 사람 같았으면 겉으로나마 일정한 자숙의 시간을 거친 다음에 정치무대로 복귀했으련만, 마리우스는 그 웬만한 보통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얼마 후 그는 법무관 선거에 나가 결국은 당선의 영광을 안았기 때문이다. 비록 맨 마지막으로 당선자 명단에 올랐지만 말이다.


쉴 새 없이 선거운동에 매진하느라 너무 많이 진을 뺀 탓이었는지, 아니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는 것이 그의 인생의 본질적 목표였기 때문이었는지 우리로서는 그의 내심과 사정을 확인할 도리가 없으나 마리우스는 법무관으로서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역시 그는 문보다는 무가 익숙한 인간이었다. 법무관 임기가 만료된 다음 히스파니아의 한 지사 자리로 가자마자 그곳을 소란스럽게 만들던 도적떼들을 그는 일거에 소탕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칼의 힘에만 의지해 미래를 개척해나가기는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때까지의 그는 재력도, 웅변술도 변변치 못했다. 불굴의 인내력과 소박한 생활태도가 만들어준 대중적 영향력을 안정적으로 이어가려면 획기적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 돌파구는 로마의 대표적 명문가인 카이사르 집안의 딸을 배우자로 얻음으로써 마침내 뚫리게 된다. 저 유명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이기도 한 율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드디어 마리우스에게도 그동안 간절히 소망해온 비빌 언덕이 생긴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