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시 전쟁은 포에니 전쟁 등에서 로마를 위해 피를 흘렸던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게 로마가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상응하는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자 이들 도시가 로마에 반기를 들어 빚어진 전쟁이었다. 로마의 명장들이 총출동해 진압에 나섰지만 전략과 전술의 질에서도, 병력과 물자의 양에서도 로마와 대등한 옛 연합국들을 쉽게 제압할 수는 없었다. 이 전쟁은 반란을 일으킨 도시들이 무기를 내려놓는 조건으로 로마가 봉기한 도시의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만 3년 만에 끝을 맺었다. 이탈리아 반도 전체로 시민권이 확대됨으로써 로마는 전통적 형태의 도시국가의 틀에서 마지못할지언정 벗어나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은 어떨지 몰라도 마리우스만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참전했을 것임이 확실하다. 그는 일흔 살에 가까운 고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병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선을 누볐다. 세상은 속일 수 있어도, 나이를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무리하게 종군해 과도한 군무를 짊어진 후유증으로 병석에 드러눕고 만 마리우스는 장군의 자리를 내놓고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가 군문을 나오기 무섭게 마리우스가 학수고대해온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이 개시되었다. 로마에서는 폰투스군과의 전투를 책임질 지휘관들로 마리우스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하마평에 올랐는데 마침 마리우스는 미세눔 근처에 위치한 사치스러운 별장에서 요양을 하는 중이었다.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로마로 귀경한 마리우스는 마르스 광장, 곧 군신의 광장에서 손자 또래의 발가벗은 젊은이들 틈에 똑같이 나체로 뒤섞여 무술을 연마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러나 나이 탓인 듯 몸은 비둔해졌고, 호흡이 자주 가빠졌다고 플루타르코스는 냉소적으로 기록하였다. 세간에서는 알몸으로 태어난 마리우스가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알몸으로 돌아갔다고 빈정대며 그의 끝 모를 욕심을 비판했다고도 한다. 마리우스는 자신이 전쟁터로 출정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그의 아들을 번듯한 군인으로 키우기 위해서라는 군색한 이유에서 찾았다.
동맹시 전쟁과 파벌 싸움으로 가뜩이나 뒤숭숭해진 로마의 정국은 마리우스가 오만불손한 성격의 술피키우스에게 정사를 맡김으로써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술피키우스는 사투르니누스의 추종자였는데 겁이 많은 인간이었던지라 무려 600명의 호위병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이 정도 숫자면 속된 말로 눈에 뵈는 것이 없었으리라. 원로원 의사당을 습격한 술피키우스는 당초 사냥감이었던 집정관이 도망치자 그의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죽였다. 술피키우스는 이참에 적의 숨통을 확실히 끊고자 반대파의 수괴라 할 술라의 목숨을 노렸지만 술라는 마리우스의 집으로 피신하는 꾀를 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후에 술라는 마리우스의 집에 숨은 것이 아니라 그곳으로 연행된 것이라고 회고록에서 변명하다. 아마 마리우스가 술라보다는 덜 모질고 독했던 듯하다. 비슷한 상황에서 술락의 자택에 은신한 마리우스가 과연 무사했을지는 지극히 의문이기 때문이다.
술피키우스는 친위 쿠데타에 성공했다고 판단하고서 마리우스를 폰투스와의 전쟁을 지휘할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마리우스는 두 명의 호민관을 술라에게 보내 그의 지휘권을 박탈하려 했다. 그런데 마리우스 같았으면 군권을 순순히 내놓았을까? 술라는 두 명의 호민관을 살해하는 것으로 응답을 대신하고서 3만 5천 명의 완전무장한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였다. 로마군이 로마를 향해 창끝을 겨누는 내전의 시대가 비로소 본격 개막된 것이다. 술라가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마리우스는 로마 시내에 잔존한 술라의 지지자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그렇지만 분풀이만으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다. 술라 측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병력수를 채우고자 마리우스는 자유를 약속하면서 노예들을 병사로 뽑으려고 했으나 단 세 명의 노예들만이 마리우스의 입대 제안에 응했을 따름이었다.
짧은 저항 끝에 중과부적에 봉착한 마리우스에게 남은 선택은 오로지 삼십육계 줄행랑뿐이었다. 주군이 도망치자 지지자들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야음을 틈타 본인 소유의 별장으로 피신한 마리우스는 아들 소(小) 마리우스를 이웃에 사는 사돈집으로 보내 도주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시키고, 자신은 오스티아 항구로 도피했다가 아들이 따라오지 않자 사위 그라니우스만을 대동하고서 배를 탔다. 아버지 일행에 합류하지 못한 소 마리우스는 달구지에 실린 콩더미 속에 몸을 감춰 추격대를 따돌린 후에 아프리카로 항해하는 선박에 몸을 실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강대한 권력을 행사했던 마리우스 일가는 하룻밤 사이에 목숨마저도 위태로운 절망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거센 폭풍우와 식량 부족에 더해 아버지 마리우스에게 고통스러운 뱃멀미까지 올라오자 도망자들은 키르케이움 부근의 해변에 상륙했지만 그들을 추적하는 기병대가 곧 들이닥치리라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다시 힘들게 발걸음을 놀려야 했다. 그럼에도 마리우스는 부하들에게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 말 것을 연신 호소하였다. 마리우스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그가 어렸을 적에 일곱 마리의 독수리 새끼들이 담긴 독수리 둥지가 나무에서 떨어지자 이를 옷자락으로 받아낸 일이 있는데, 이는 아이가 자라서 나중에 일곱 차례나 고관대작을 지낼 징조라는 점쟁이의 예언을 그의 부모는 물론 그 역시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생애 최대의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이러한 믿음은 한층 더 견고해졌다.
믿음은 믿음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마리우스의 도피행각을 계속 도왔다가는 자기네 안위도 위험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선원들이 그를 해안에 매정하게 내버리고선 닻을 올리고 가버린 것이다. 체면이고, 염치고 다 던져버린 마리우스는 어느 오두막집에 사는 노인에게 도와줄 것을 애걸하고, 그마저 여의치 않자 벌거숭이가 된 채로 흙탕물로 가득한 웅덩이에 뛰어들었다. 허나 이러한 몸부림도 소용없이 그는 결국 추격대에게 붙잡히고 만다.
점쟁이의 예언이 적중한 것일까? 추격대로부터 마리우스의 신병을 인도받은 민투르나이의 지방장관이 신중한 처리를 위해 그를 한 노파의 저택에 유폐시켰는데, 판니아라는 이름의 여주인은 과거 이혼소송에서 판사였던 마리우스가 그녀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던 악연이 있음에도 이에 개의치 않고 마리우스를 정성을 다해 돌봐주었다.
마리우스는 죽이기에는 너무나 거물이었다. 지사와 시의원들이 그를 처형하기로 결정을 내리기는 했으나 문제는 집행이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도 버겁거늘, 하물며 호랑이의 목에 누가 감히 칼을 들이밀려 하겠는가? 군인 한 명이 그가 머물고 있는 방에 들어왔다가 마리우스의 호통에 기겁해 달아나자, 주민들은 야만족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구원한 구국의 영웅인 그를 살려주기로 결정하고서 마리우스를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벨라이우스가 제공한 갤리선에 승선시켰다.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우여곡절을 거쳐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부지한 마리우스는 중도에 헤어진 동행자의 무리들과 아이나리아 섬에서 극적으로 해후했지만, 시칠리아의 에릭스 근방에 식수를 보충하려고 잠깐 기항했다가 수행원 16명이 술라에게 충성하는 병사들에게 붙잡혀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끔찍한 횡액을 당했다. 황급히 다시 바다로 나아간 마리우스는 메닌크스 섬에 들렀다가 거기에서 아들 소 마리우스가 누미디아의 왕 히엠프살에게 원조를 요청하려고 아프리카로 갔다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이제 목적지는 분명해졌다. 로마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인 카르타고가 마리우스가 재기를 위해 찾아가야만 할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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