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 퀸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이하 티투스)는 서력으로 기원전 230년경 태어나 174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로, 그의 삶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그리스의 독립투사 필로포이만과 비교되어 서술되고 있다. 티투스가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로마의 세력범위 내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수완과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분노마저도 온화하게 표현했다고 말해지니 대단히 포용력 있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포용력은 로마와 마케도니아 간의 종전 협상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티투스는 로마에 볼모로 잡혀온 필리포스왕의 아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줄 정도로, 불가피하게 전쟁을 벌여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유화적 자세로 대외정책을 펼쳐나갔던 것이다.
후세인들이 유념해야만 할 부분은 티투스의 온화함과 포용력 안에는 불타는 야심과 커다란 출세욕이 숨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기에게 신세를 지는 사람들보다는, 자기 쪽에서 신세를 져야만 하는 사람들을 되레 더 경계했다고 전해진다. 왜냐면 후자들은 언젠가는 티투스와 경쟁관계에 놓일 가능성이 높았던 이유에서였다. 당시의 로마에서는 인정을 많이 베풀고, 인심을 듬뿍 쓰는 행동만큼 정치적으로 지지자들을 신속히 규합하기에 효과적 책략도 드물었던 탓이다.
이와 같은 뿌리 깊은 경쟁심은 만년에 치명적 재앙을 낳고 만다. 소송의 달인 카토를 대담하게 선제적으로 고소했다가 티투스의 동생의 잔인하고 엽기적인 행각으로 말미암아 카토에게 역으로 되치기를 당하는 바람에 동생은 물론이고 그 또한 모든 관직과 재산과 명예를 잃고 거지와 다름없는 불우한 삶을 지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티투스는 서른 살도 채 안 되는 매우 젊은 나이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대외적 환경이다. 북아프리카로 원정을 떠난 스키피오의 로마군이 자마에서 한니발의 군대를 대파하면서 카르타고는 더 이상 로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 개발된, 이제는 그 장단점이 모두 훤하게 드러난 장창에 바탕을 둔 밀접대형을 여전히 고집한 결과로 로마에게 전투 때마다 번번이 깨지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지중해에서 로마의 패권이 거의 완성된 시점이었다. 따라서 큰 희생이 따르기 마련인 무력에 의한 정복 대신에, 능숙한 외교술만으로도 로마의 목표와 국익을 어렵지 않게 관철시킬 수가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정략과 설득력이 뛰어난 온정적 성격의 소유자가 새롭게 요구되었다. 포커페이스의 대명사인 티투스야말로 이런 임무에 안성맞춤이었다.
둘째는 대내적 조건의 변화다. 로마사회에 일종의 베이비붐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전후에 사회가 안정되면 출산율이 급등하는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히 나타나온 일이다. 더욱이 이때의 로마는 국제사회에서 항시 ‘갑질’을 할 수 있는 당당한 전승국이었다. 로마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개성으로 똘똘 뭉치고 자신감으로 충만한 베이비부머들이 대거 출현했을 테고, 이들 고대의 신세대들에게 미소와 달변이 돋보이는 젊고 매력적인 청년 정치인 티투스는 그들의 이해와 요구를 훌륭하게 대변해줄 인사로 제격이었을 게다.
티투스는 자신을 권력의 심장부로 밀어 올려준 내외적 요소들을 명백히 인식하였고, 그에 조응하여 민활하게 처신하였다. 그는 정복당한 그리스인들의 민심을 얻기 위하여 로마군에게 승자의 당연한 권리로 통용되어온 일체의 약탈을 금지시켰으며, 스스로를 점령군 사령관이 아니라 해방군의 총수로 각인시키는 데 이바지할 조치들을 주도면밀하게 취해나갔다. 이를테면 그리스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든 체육대회에 나가서 로마 주둔군의 철수와 조세의 감면을 직접 발표했던 것이다. 이때 그리스인들이 너무나 기쁨에 겨워 지른 함성소리로 인하여 하늘을 날던 새들이 놀라서 땅으로 떨어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는 모국에 귀환해서도 자세를 한껏 낮추었다. 티투스는 수시로 원로원에 출석해 본인의 입장과 심경을 겸손하고 소상히 설명하였고, 로마가 탄생한 이래로 성공적으로 검증되어온 전통적 방식들에 별다른 수정이나 변경을 가하지 않고서 이를 착실히 계승․운용하였다.
허나 티투스의 성취와 성과물은 그의 개인적 역량에 못지않게 상승일로에 있던 로마의 국력이 뒷받침된 덕분에 가능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 시각이리라. 예컨대 그는 종래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해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전장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보자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평생을 들판의 잡초처럼 살아간 그와는 동시대인인 필로포이만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티투스에게 잘 훈련된 수만 명의 최정예 징집병들이 자동으로 할당된 바로 그 순간에 필로포이만은 고작 수천 명의 조악하고 미숙한 의용군을 만들어내고자 나 홀로 동분서주해야만 했으니.
그래서 플루타르코스는 “곤궁한 자의 소원들 들어준”, 즉 풀죽은 그리스인들한테 적당한 시혜만 베풀어주는 것만으로도 주어진 소임을 너끈히 완수할 수 있었던 티투스보다는, “강대한 자의 분노에 반항해야 했던”, 곧 펠로폰네소스로 통하는 코린트 지협에 장판교의 장비처럼 혼자 우뚝 서서 세계최강 로마로부터 그리스의 독립과 자주성을 꿋꿋이 지켜낸 필로포이만을 훨씬 더 높이 평가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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