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크 영웅전

개혁세력의 영원한 반면교사 마리우스

공희준 2015. 1. 26. 12:30

‘나는 꼼수다’의 진행자였던 시사평론가 김용민 PD는 한겨레신문이 만드는 팟캐스트인 ‘뉴욕타임스’에 옛 통합진보당의 김재연 전 의원과 함께 출연한 자리에서 김 전 의원은 단체전으로 욕을 먹었지만, 자신은 개인전으로 비난을 받았다면서 그나마 김 전 의원의 처지가 자기 경우보다는 조금은 낫지 않겠느냐며 너스레를 떤 적이 있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BC 157~86)가 생존했던 당시에도 인터넷 방송이 존재했다면 그도 아마 김용민씨와 비슷한 심경을 토로했을지 모른다. 아테네의 민주파들은 단체전으로 분산되어 들어온 저주와 원망을, 로마에서는 개인전 경기처럼 본인 혼자서 다 뒤집어쓰고 있다고 말이다.


실제로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마리우스에 관한 부분을 거의 험담에 가까운 인상비평을 다짜고짜 늘어놓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가 라벤나에서 구경한 석상에 조각된 마리우스의 얼굴이 아주 난폭해 보였다는 것이다. 사실 인상이 나쁘기로는 플루타르코스의 가치관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소크라테스도 마리우스에 절대 뒤떨어지지 않았는데도. 그가 이렇게 마리우스에게 지독한 악평을 퍼부은 것은 아테네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 중우정치가 내용에서도, 형식에서도 더 타락하고 거칠어진 양상을 띠고서 마리우스의 집권기간 내내 로마에서 극성을 부렸다고 플루타르코스가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리우스가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귀족들의 권력 독점과 토지 겸병의 추세를 되돌리려고 노력했음은 부정하기 힘든 역사적 진실이다. 문제는 마리우스가 로마를 고대 지중해 세계의 최강국으로 밀어올린 원칙들을 지키는 것을 정치의 목적으로 삼았으면서도, 그 원칙들의 중요한 구성요소들을 실행 과정에서 무분별하게 훼손했다는 점이다.


첫째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깬 일이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마리우스의 처조카이기도 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 공화정 시대 로마 최초의 군사 쿠데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삼두정치체제를 거친 끝에 악티움 해전에서 카이사르의 후계자라 할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를 격파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로마의 내전은 마리우스가 그의 정적인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를 군대를 동원해 집회장에서 끌어낸 사건에서 효시를 찾는 게 타당하리라.


둘째는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전통을 무시한 일이다. 그는 호민관을 지낸 다음 조영사에 입후보했는데 직급이 높은 쿠룰레 조영사에 출마했다 낙선한 바로 당일에 한 단계 아래의 평민 조영사직에 도전했다가 여기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무관 선거에 나아가 당선되기는 했으나, 이를 훌륭한 정치가의 기본자질인 강력한 권력의지의 발로라고 마냥 긍정적으로만 해석해주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추태였던 이유에서다. 물론 그와 같은 집념 덕분에 마리우스가 7번이나 집정관으로 선출될 수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겠다.


셋째는 철저하고 치밀한 준비 작업을 생략한 일이다. 상대방을 죽이지도 못하면서 약을 올리는 짓이야말로 개혁가가 가장 피해야 할 자충수이다. 마리우스는 대외전쟁에서는 누미디아의 유구르타 왕과 북방의 여러 게르만 부족들을 완파한 경력이 증명하듯이 말끔한 마무리 솜씨를 선보였다. 반면, 국내정치에서는 개혁의 대상이 되는 보수세력을 완벽히 제압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괜히 벌집만 들쑤신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 마리우스 사후에 귀족파의 총수 술라는 평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의 시신을 부관참시하기에까지 이른다. 변화와 혁신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마리우스의 실패사례는 두고두고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 본문은 북촌학당 소식지에 보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