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산드로스(?~BC 395)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정복해 이를 분쇄한 스파르타의 전쟁영웅으로서 인생의 만년에 이르러서는 운명의 장난으로 말미암아 역성혁명을 꿈꾸며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민주주의를 지향해나갔던 괴이하고 모순적인 사나이였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는 그의 출생연도가 기원전 445년으로 설정돼 있으나 실제로는 더 이전에 태어난 듯하다. 인류의 평균수명이 현재와 견주어 월등히 낮았던 시대임에도 나이 50살의 남자를 완연한 노인으로 묘사하지 않기는 과거나 지금이나 비슷한 이유에서다.
리산드로스의 행적과 생각을 제대로 파악해나가려면 그의 삶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이해가 필수불가결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그 복잡다단한 전개과정에도 불구하고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고서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고대 서양의 세계전쟁”이라고 불러야 올바를 것이다. BC 431년에 발발해 BC 404년에 끝난 이 전쟁에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이나, 스파르타가 맹주를 자임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가운데 한 쪽 진영에 적극적으로건 소극적으로건, 자의로든 타의로든 가담해 싸웠기 때문이다.
전쟁은 본디 잔인한 법이고,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전쟁의 잔인함은 깊이와 넓이를 더해가기 마련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도 그랬다. 중국 역사의 척도에 대입해본다면 300여 년에 걸쳐서 서서히 이뤄진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의 이행이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30년도 채 안 되어서 완료되었다. 초전 단계에서는 법도와 윤리와 예의의 외양을 갖추고서 신사적으로 펼쳐지던 전쟁의 양상이 후반부에 접어들면 승리에 도움만 된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른바 개싸움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은 아테네의 급속한 성장을 시샘한 스파르타의 선제공격에 전쟁의 원인이 있다는 일반적 고정관념과는 달리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먼저 도발한 측은 아테네였다는 점이다. 더욱이 개전의 주역은 아테네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대정치인인 페리클레스였다. 그럼에도 스파르타에게 전쟁에 대해서 더 큰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후세의 구미 사가들이 아테네를 그들 역사의 정통으로 간주한 데 있다.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원산지임을 자부해온 콧대 높은 서양인들이 전체주의의 원형이자 군국주의의 원류라 칭해야 마땅할 스파르타에서 제 집안의 족보를 가져오기는 쑥스러운 노릇 아니겠는가?
리산드로스는 칼과 방패의 전쟁에서 칼과 방패와 음모의 전쟁으로 바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속임수에 능하기로는 단연 발군이었다. 로마의 영웅들은 티 안 나게 은밀히 평가절하하고, 그리스 영웅들은 드러내놓고 공공연히 추켜세운 플루타르코스조차 오죽했으면 리산드로스한테 주저 없이 ‘속임수의 대가’라는 꼬리표를 붙여줬었겠는가?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되듯이, 아테네 태생인 플루타르코스는 일단 로마인과의 비교선상에 놓이자 그리스인들을 출신지역을 불문하고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값을 후하게 쳐주었다. 그럼 리산드로스가 민주주의의 파괴자에서 종국에는 민주주의의 부활로 연결될지도 모를 역성혁명을 왜 꾀하게 됐는지 플루타르크의 붓끝을 통해 내력과 속사정을 찬찬히 들어보도록 하자.
리산드로스의 아버지 아리스토클리투스는 빈곤한 평민이었다.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대업을 이룩한 자들은 거의 모두가 자기의 뿌리를 신적 존재에서 찾아왔다. 리산드로스의 아버지는 헤라클리다이, 곧 헤라클레스의 후손이였다고 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의 동료와 경쟁자들이 쟁쟁한 가문의 자제들이었을 터이므로 개천에서 난 용인, 자수성가한 리산드로스가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은 따라서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직업적 혁명가가 되기로 일찌감치 결심하지 않을 바에는 배경이 시원치 않은 야심만만한 청년들이 사회에서 출세하려면 공동체가 부과하는 의무들을 충실히 수행하는 모범생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리산드로스가 바로 그러하였다. 그는 스파르타의 관습과 전통에 순종하였고, 여느 스파르타 청년들처럼 쾌락을 몹시 경멸하였으며, 나라의 부름에는 앞장서 응했다. 그렇지만 세평에는 아주 민감하여 불명예스러운 사태를 겪게 되면 격심한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쾌락을 경멸하면서도 세간의 평판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양새가 머릿속에서 선명히 잘 그려지지 않는 분들께서는 깊은 산사에서 열심히 참선과 수양에 매진하면서도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열심히 댓글을 달고 있는 현대인의 이중적 모습을 떠올리시길 바란다.
그러나 다른 스파르타인들에게는 발견하기 힘든 독특한 개성이 리산드로스에게는 있었으니 그러한 면모란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하는 자세와, 이익을 위해 자존심을 누르는 태도였다. 한 방에 훅 날아갈 수 있는 취약한 신분과 혈통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자구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군으로서 명성을 날리기 전까지 그는 스파르타 사회 안에서 을이고 미생이었다.
언제나 발밑이 단단한지를 살피며 살아가는 그의 이와 같은 신중한 성격은 아테네와의 전쟁에서 이겨 얻어낸 막대한 양의 배상금과 전리품을 스파르타로 반입해 사치와 허영, 그리고 배금주의를 조장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가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절대로 부정부패에 연루하지 않는 기묘한 결과를 낳았다. 이토록 지독하게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리산드로조차도 자식들에 대한 애틋한 부정만은 감출 수 없었던지 그는 시칠리아의 참주인 디오니시우스가 딸들에게 주라고 선물한 값비싼 옷들을 처음에는 고사하는 척하다가 결국은 능글맞게 수중에 챙겼다. 딸들을 스파르타의 부유한 명문가 청년들과 약혼시켰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듯싶다.
스파르타에 물질만능주의 풍조가 확산된 것을 리산드로스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왜냐면 리쿠르고스가 스파르타 국가의 기초를 정립하면서 상정했을 금욕주의적 군국주의 사회는 외부 세계와의 접촉과 소통이 완벽히 차단된 폐쇄체제가 전제돼야만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리쿠르고스가 금과 은의 사용을 금지하면서 궁극적으로 모든 화폐를 민중의 경제생활에서 추방한 조치도 화폐가 외국과의 교역과 통상에 나설 동기들을 국민들에게 유발할 것이라는 우려감에서 연유하였다.
그런데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수만 명의 스파르타 젊은이들이 답답한 자국의 영토를 벗어나 발칸반도 곳곳은 물론이고 소아시아와 시칠리아 등의 지중해 도처의 번영하고 개방된 이국의 제도와 문화와 풍물들을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럽 전선으로 파견된 흑인 병사들이 인종차별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덜한 파리와 같은 서유럽 대도시들을 거쳐 가면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인권의식에 눈뜨게 된 경우와 흡사하다고 하겠다.
전쟁이 장기전화하면서 전황은 아테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는 아테네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대오에는 커다란 균열이 없었으나, 델로스 동맹은 동맹에 소속된 도시들이 갹출해 마련된 재원을 아테네 혼자서 독단적으로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쟁의 구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전체 대 델로스 동맹 전체’에서, ‘펠로폰네소스 동맹 전체 대 아테네 단독’으로 차츰차츰 변화하였다. 단체전으로 붙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실상 아테네 홀로 스파르타를 위시한 많은 적국들을 상대하기는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전세를 일거에 만회하려는 목적에서 스파르타에게 식량 기지 역할을 해주는 시라쿠사 정벌을 착수했지만, 아테네의 건장한 남성들이 대부분 동원된 이 대담한 작전은 아테네군 원정대가 졸렬한 지휘에 더해 병참선까지 차단당한 끝에 시라쿠사 군대와 스파르타 분견대의 협공을 받고서 마침내 전멸하고 마는 참담한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 패전의 후유증으로 그동안 간신히 지켜오던 제해권마저도 스파르타로 넘어갔으니 아테네로서는 도둑맞은 집에 불까지 나는 격으로 설상가상의 형국이었다.
허나 부자 망해도 3년 간다고, 육군이 전멸하고 해군이 약체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라는 촛불은 단숨에 사그라지지 않았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오히려 활활 타오르듯이 시칠리아에서의 대승에 도취해 방심한 적군에게 효과적으로 역습을 가함으로써 스파르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아테네의 반격이 성과를 거둔 까닭은 그리스판 난세의 간웅이라고 불러도 무탈할 명장 알키비아데스가 군대의 지휘권을 다시 장악한 데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라는 여우에 능수능란하게 맞설 수 있는 인재는 능구렁이와 같은 리사드로스뿐이었다. 스파르타와 그의 동맹국들은 리산드로스에게 제독의 지위를 수여하면서 함대의 미래 또한 함께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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