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크 영웅전

플라톤이 찬양한 유일한 아테네 정치인 아리스테이데스

공희준 2014. 11. 17. 00:27

플라톤은 전체주의 사상의 원조로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온 철학자이다. 그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치에 저주와 악담에 가까울 만큼의 혹독한 비판을 가했던 탓이다. 아테네의 패권 장악을 이뤄낸 페리클레스마저 플라톤의 레이저광선을 피해가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런 플라톤조차도 찬사와 칭찬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바로 아리스테이데스다. 기원전 520년과 468년이 각각 생몰연도로 추정되는 그는 두 딸이 지참금이 없어서 시집을 가지 못했다는 기록이 말해주듯이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독히 가난한 삶을 살았다. 한 국가의 통치자 계급에게 극단적 내핍과 시종일관한 자기절제를 요구했던 플라톤이 그의 구미와 바람에 딱 알맞은 이상적 인물상을 아리스테이데스에게서 찾아낸 것은 매우 당연한 귀결이었으리라.


밀집대형을 형성한 아테네의 중장보병이 수적 우위에 더해 강력한 기병대까지 포함된 페르시아 육군에게 대승을 거둔 마라톤 전투를 현대 영국의 대표적 전쟁사가인 풀러는 “서구 문명이 탄생한 날”로 평가한 바 있다. 아리스테이데스는 올림픽경기의 꽃이라 할 마라톤 경기의 효시가 된 이 전투를 그리스 측의 승리로 이끈 실질적 주역이었다. 당시의 아테네는 적의 대군이 코앞에 밀어닥친 급박한 상황임에도 10명의 장군이 하루씩 교대해가며 번갈아 군을 통솔하는 터무니없이 비효율적인 지휘체제를 고집하고 있었다. 참주에 대한 뿌리 깊은 공포에서 비롯된 과민반응의 연장선이었다.


아리스테이데스는 자신이 지휘를 맡기로 예정된 날의 지휘권을 아테네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 손꼽히던 밀티아데스한테 과감히 양도하고 다른 장수들도 이러한 결단을 내리도록 설득함으로써 아테네 군대가 일사불란하게 전투에 임할 수 있는 태세를 확립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가 페르시아 함대를 격멸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활약은 빛났다. 과거에 자기를 도편추방하게끔 민중을 선동한 악연이 있는 오랜 앙숙이자 정적인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적 선택을 흔쾌히 지지함으로써 아테네군이 살라미스섬 근해에서 크세르크세스왕의 페르시아군과 성공적 결전을 벌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리스테이데스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평화적 국제질서를 창출한 주역이기도 했다. 그가 에게해 곳곳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탄생시킨 델로스 동맹은 세계정부와도 같은 구실을 해냈다. 델로스 동맹은 지금으로 치자면 국제연합(UN)+세계은행(WB)+국제통화기금(IMF) 모두를 효과적으로 합쳐놓은 기구였던 이유에서다. 문제는 그의 사후에 페리클레스와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후배 정치인들이 델로스 동맹을 그리스 전체의 조화로운 공존공생을 외면하고 오직 아테네의 이기적 이익만을 도모하는 기구로 변질시켰다는 점이다.


아리스테이데스는 근본적으로 덕(德)을 숭상하는 정치가였다. 그는 패각추방 제도에서 생생하게 드러난 아테네 특유의 고질적이고 극단적인 뺄셈의 정치를 철저히 반대했다. 심지어 자신을 추방시켰던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번에는 역으로 시민들에게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최선을 다해 그를 옹호하였다.


같은 그리스인들을 향해서는 한없이 공정하고도 너그러웠지만, 그리스를 호시탐탐 위협하는 페르시아에게는 한없이 거칠고 교활했던 아리스테이데스는 로마와는 다르게 시스템의 힘이 아닌 몇몇 탁월한 개인들의 역량에만 의지해 운영되었던 그리스 세계가 낳은 최고의 정치인이었음에 틀림없다. 허나 언제나 그렇듯이 개인기는 조직력을 당해낼 수가 없기 마련이다. 로마의 영광은 천년을 이어갔지만, 아테네의 영화는 고작 반세기 남짓에 머물렀으니.


- 북촌학당 회보에 올린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