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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투쟁을 즐기자 (Enjoy Power Struggle!)

공희준 2015. 4. 9. 03:19

“친노와 비노의 싸움 때문에 안 된다.” 자타칭 정치 전문가들을 붙잡고 야당이 어째서 저 모양 저 꼴로 망조가 들었느냐고 물으면 백이면 백 이러한 대답이 자동응답기처럼 돌아오기 마련이다.


나는 그와 같은 견해에 전연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 친노와 비노가 당장 싸움을 멈추면 야당이 그 즉시 국민들의 믿음과 지지를 회복하고, 유능하고 책임감 있는 수권정당으로 변신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단적인 사례를 들자면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제일 당내 화합이 잘된 야당이 어떤 정당인지 아는가? 바로 전두환 정권 시절의 민주한국당, 곧 민한당이었다.


야당은 친노와 비노가 허구한 날 싸움질만 하느라 망한 것이 아니다. 제대로 싸우지 못해서 몰락했다. 친노와 비노의 싸움이 확실한 결말을 내지 못한 채 거의 언제나 어정쩡한 봉합으로 마무리되는 탓으로 말미암아 야당은 말도 아니고, 막걸리도 아닌 음용하기 곤란한 이상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형태는 잡탕인데 실제로는 맹탕인 셈이다.


정치의 본질과 요체는 권력투쟁에 있다. 권력투쟁을 혐오하고 불온시하면서 정치발전을 꾀하는 것은 축구에서 슈팅을 금지하거나, 야구에서 홈런 타구를 전부 파울로 처리하는 일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한마디로 정치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추방하자는 무지막지한 소리와 다름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도,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크 영웅전」도 따지고 보면 적나라한 권력투쟁의 기록이다. 그곳에서 권력투쟁의 역사를 빼면 뭐가 남겠는가? 청년들을 무기력한 패배주의에 빠뜨린 사악한 주범의 하나로 최근 들어 수시로 맹렬하게 질타당하곤 하는 앙상한 자기계발서만이 남으리라.


훌륭한 리더는 권력투쟁을 반기고, 즐기고, 환영하는 인물을 뜻한다. 야당이 여당에 중요한 선거 때마다 번번이 뒷심 부족으로 패배하는 것은 권력투쟁을 반기고 즐기고 환영하는 인사들이 여당에 야당보다 더 많은 이유에서였음을, 비노가 친노에게 중차대한 고비마다 습관적으로 무릎을 꿇어온 원인은 권력투쟁을 반기고 즐기고 환영하는 정치인들의 숫자가 친노세력에 견줄 때 비노진영에 훨씬 적은 데 있었음을 이제라도 다들 명징하게 깨닫기 바란다.


☞ 군주론 강독 예고


오늘날의 우리나라 현실정치에서 그 의미와 중요성이 가장 과대평가된 것은 콘텐츠이고, 그 위상과 역할이 가장 과소평가된 것은 리더십이다. 안철수 의원은 [콘텐츠의 과대평가와 리더십의 과소평가]라는 덫에 자승자박으로 걸려듦으로써 돌이키기 어려운 치명적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자신이 직면한 문제와 한계의 근본적 원인이 리더십의 부족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여전히 인식 또는 인정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잡다한 세미나들만 부지런히 쫓아다니고 있는 안철수의 신발 신고 발등 긁는 격화소양의 모습이야말로 그러한 맹점의 생생한 증거이리라.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는 성공적 리더십은 권력투쟁을 반기고 즐기고 환영하며, 권력투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자질임을 날카롭게 간파한 위대한 역사가이자 탁월한 정치 철학자이다. 「군주론」은 그의 빼어난 통찰이 오롯이 담긴 불멸의 역작이다.


리더십의 결여를 노선이나 콘텐츠로 벌충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똑똑한 바보들을 깨우쳐주고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매주 1회씩 약 한 달에 걸쳐 조만간 강독할 예정이다. 지금 시점에서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한 가지 까닭을 더 추가하자면 「플루타르크 영웅전」 읽기 모임의 진수라고 일컬을 수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 부분을 목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으로 일종의 예습을 하자는 취지다. 나의 기획과 노력이 리더십의 실패를 노선과 콘텐츠로 만회하겠답시고 헛심을 쓰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