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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는 정치에서 손을 떼라

공희준 2015. 4. 3. 02:33

안철수 의원과 딱 한 차례 비교적 장시간 진지한 얘기를 나눠본 적이 있다. 시기는 2013년 봄에 치러진 노원병 보궐선거에서의 압승을 발판으로 삼아 그가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한 직후였다. 여러 명이 철수형을 30분 정도 함께 면담하는 자리였다. 그게 무슨 진지한 장시간의 소통이냐고 핀잔할 분들도 있겠으나 당시 그는 정치권 전체를 통틀어 차기 대권주자 지지도 1위를 달리는 귀하신 몸이었던 까닭에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가며 쓰는 상황이었으므로 일개 무명 삼류작가에 불과한 내 입장에서는 아주 긴 시간의 만남이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무슨 비밀스러운 내용의 대화가 오간 것은 아니었으니 혹여 천기누설에 가까운 대단한 폭로를 은근이 바랐을 사람들은 여기서 읽기를 그쳐주시라. 내가 비록 사회생활에 엄청 서투른 편이기는 해도 남과 나눈 이야기 함부로 까발릴 정도로 무모하거나 무례한 인간은 아니다.


그때 안철수 의원은 우리나라에서는 정치가 경제만 못하다는 푸념 섞인 지적을 했던 걸로 기억된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이건희류의 경제우월론과 정치열등론이 한국사회에서 어디 하루이들 인구에 회자된 담론이겠느냐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팍 정중앙으로 100톤짜리 철근이 쾅 하고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과 경악을 느꼈다. 정치인이, 그것도 박근혜 정권에 맞설 임무가 있는 유력한 야권 정치인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소리였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안철수 의원의 발언을 묵묵히 듣고 있던 모임의 다른 참석자들과는 달리 “그건 의원님께서 뭘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고요”라고 눈치 없이 철수형의 주장을 곧바로 거의 들이박듯이 당돌하게 맞받아쳐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래서 내가 출세를 못한다.


안철수 현상이 허망한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 높던 철수형의 지지율이 오랜 가뭄 끝에 바닥이 쩍쩍 갈라진 저수지마냥 말라버린 원인과 이유를 설명해놓은 분석과 진단들은 이미 차고도 넘친다. 작년의 지방선거 국면에서 당대표로 있던 안철수 의원이 윤장현씨를 광주시장 후보로 무리하게 밀어붙였을 때 천정배씨와 더불어 사실상 유일하게 철수형의 전략공천 방침을 지지했던 인물이 정동영씨였다. 그런 정동영씨를 떨어뜨리려는 친노들의 움직임에 태연히 한 발을 걸치는,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작태 또한 안철수의 몰락과 쇠망에 주요하게 이바지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다양한 이유와 원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선차적 요소는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나는 안철수 의원이 [문재인도 영남, 정태호도 영남, 안철수도 영남]인 영삼 트리오 모양새가 나타날 것이 명명백백함에도 기어이 신림동까지 찾아가서 정동영씨의 등에 비수를 꽂은 행동은 단지 그가 신의가 없는 성격이라거나, 정치적 지능지수가 모자란 탓에 발생한 불미스러운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철수는 왜 실패했을까?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그를 여야를 모두 위협하는 강력한 대선후보로 단박에 끌어올린 것도, 그가 자신의 지지자들의 기대와 여망을 상습적으로 무참히 배신하곤 하는 엽기행각을 서슴없이 저지르도록 부추겨온 것도 그 뿌리는 반정치의 정치에 닿아 있다. 환언하자면 “정치의 역할과 존재가치를 부정하고 저주하며 정치를 하는 반(反)정치의 정치”의 동력과 기제가 안철수를 단숨에 하늘 높이 올려놨다가, 재빨리 땅바닥으로 인정사정없이 내팽개친 것이다.


국회의원의 숫자를 줄여야 한다며 현대 민주정치의 근간인 대의정치의 존재를 무시한 사태도, 기초자치단체의 정당공천을 폐지해야 한다면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치를 폄하한 해프닝도, 그리고 다수의 동지들이 열심히 준비하던 신당창당 작업을 독단적으로 포기하고서 야밤에 친위쿠데타 벌이듯이 민주당에 합당을 가장한 입당을 감행해버린 기행(奇行)도 따지고 보면 안철수에게 정치는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이며 거추장스럽기만 한 쓸데없는 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눈에 모든 정치인은, 특히 선거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시도하는 기성 정치인들은 낭비의 주범이자 비효율의 화신으로 비쳤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영남패권주의의 심각한 핵심적 폐해는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자기들끼리 해먹는 권력 독식과 인사 싹쓸이에만 머물지 않는다.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정책이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추진되면서 정치를 열등한 것으로, 경제를 우월한 것으로 바라보는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시각 역시 영남패권주의의 한 축을 당당히 형성하게 되었다. 정치를 불필요하고 낭비적이며, 비효율적이고 거추장스러운, 한심하고 하릴없는 건달들의 소일거리로만 간주하는 비뚤어진 관점이 참여정부로 대표되는 소위 영남민주화세력에 의해 광범위하게 공유돼온 것도 박정희 정권이 영남에 대한 집중적이면서도 선별적 투자를 통해 급격한 경제성장을 추구한 후유증일 듯싶다. 안철수 의원에게 뿌리깊이 박혀 있을 경제는 착하고 선진적 일이고, 정치는 악하고 후진적 일이라는 그릇된 신념도 이러한 정치무용론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음은 물어보나 마나다.


따라서 저비용-고효율로 조용하고 무난하게 치러질 수도 있었을 요번 보궐선거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어버린 주역인 정동영씨나 천정배씨는 안철수 의원에게는 구태 중의 상구태로 인식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가 정태호씨를 위한 지원유세를 다님으로써 결과적으로 정동영 낙선운동에 가담한 것도 본질적으로는 경제는 좋은 것이고, 정치는 나쁜 것이라는 왜곡된 이분법적 사고가 낳은 필연적 소산인 셈이다. 철수형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새로운 정치의 궁극적 지향점은 “정치 자체의 소멸”에 있음이 반박 불가능하게 재확인되었기에 나는 그에 대한 지지를 창피함을 무릅쓰고 뒤늦게 이제야 완전히 철회한 것이다.


의사 안철수는 훌륭한 사람이다. 무료 백신프로그램 개발자 안철수도 훌륭한 사람이다. 성공한 벤처기업인 안철수도 훌륭한 사람이다. 민활한 주식투자자 안철수도 훌륭한 사람이다. 대학교수 안철수도 훌륭한 사람이다. 청년들의 멘토 안철수도 훌륭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지도자 클레망소의 빛나는 통찰처럼 전쟁이 장군들에게만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듯이, 정치는 안철수가 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나는 이쯤에서 그가 과감하게 미련 없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3년 전 여름에 떠나온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 되풀이 강조하건대 정치는 철수형이 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