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크 영웅전

스파르타쿠스를 제대로 아시나요? (1)

공희준 2015. 3. 31. 01:23

3월 초에 득녀를 했다. 부부합산 나이로 아흔한 살에 얻은 첫 번째 아이다. 이왕이면 부부합산 소득이 연간 1억 원을 여유 있게 웃도는 상황에서 아기를 낳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나는 대형마트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을 내심 은근히 경멸해온 터였다. 미워하면 닮는다고, 그런 내가 집 근처에 위치한 악명 높은 제2롯데월드 근처를 최근 들어 수시로 드나들곤 한다. 제2 롯데월드 바로 건너편에 자리 잡은 롯데마트에 가면 싼값으로 기저귀를 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구매한 무거운 기저귀 상자를 양손으로 들고서 집까지 낑낑거리며 운반해온 다음, 방에서 세상모르고 곤하게 잠자고 있는 아기를 보게 되면 솔직히 비록 잠시잠깐이나마 부아가 확 돋는다. 불쌍한 우리 아기.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부잣집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인생의 결말이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가 선정한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한 75인 중에서 8위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거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전쟁을 도발했다가 아들을 싸움터에서 불귀의 객으로 먼저 앞세우는 치명적 실책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파르티아 기병대의 교묘한 유인작전과 철통같은 포위전술에 연달아 걸려들어 허망하게 생명을 잃었을 당시에 크라수스는 수중에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해 무려 1,698억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 액수의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돈과 권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명예까지 탐내다가 자신은 물론이고 수만 명의 애꿎은 젊은 로마 병사들마저 사막의 고혼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크라수스 편에는 그가 카이사르-폼페이우스와 더불어 제1차 삼두정치 체제를 형성한 인물이었으니 만큼 크라수스 본인 외에도 지중해 세계 안팎을 무대로 고대사를 수놓은 다수의 사람들이 차례로 명멸해간다. 그들 가운데에는 별도의 독립된 장을 할애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걸출한 호걸도 등장함은 물론이다. 주연을 능가하는 화려한 존재감을 뽐내는 비중 있는 조연들인 셈이다.


주연을 압도하는 조연의 백미는 단연 스파르타쿠스이다. 마르크스는 고대의 경제체제를 노예제 생산양식으로 규정한 바가 있다. 한마디로 노예가 모든 물질적 생산을 책임졌다는 뜻이다. 노예가 왜 노예겠는가? 책임은 있어도 권리는 없으니 노예다. 일체의 권리가 박탈된 까닭에 재산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부의 대명사 크라수스와 땡전 한 푼은 고사하고 제 목숨조차도 자기의 소유물이 아니었던 스파르타쿠스의 대결이 스파르타쿠스도, 크라수스도,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로마라는 국가 자체도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해온 것은 당연한 일일 듯싶다.


극과 극의 강렬한 대비야말로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위한 창조적 영감의 풍부한 원천이리라. 이러한 영감의 원천에서 샘물을 듬뿍 퍼간 인사들의 대열에는 유명한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1928~1999)도 끼여 있다. 그는 턱 중앙에 매력적으로 깊게 파인 보조개로 한국의 올드팬들에게 친숙한 배우인 커크 더글러스를 주연으로 내세운 「스파르타쿠스(원제 : Spartacus)」를 제작했던 것이다. 이 영화가 개봉된 1960년도는 매카시즘의 유령이 미국 사회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던 때였다.


왜 스파르타쿠스가 불온한 주제였을까? 서방의 자본주의 진영에서 스파르타쿠스는 역사이지만, 동구의 사회주의권에서 스파르타쿠스는 현실이었던 이유에서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독일의 공산당 지도자들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주도적으로 결성한 혁명조직은 스파르타쿠스단이었다. 좀 더 가깝고 낯익을 예를 들자면 노태우 정권이 추진한 북방외교의 영향으로 한국과 소련 사이에 문화와 체육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가 진행되던 198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 국가대표축구팀과 친선경기를 펼친 소련의 명문축구클럽의 명칭은 모스크바 스파르타크였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가 사회주의가 머잖은 미래에 자본주의를 파묻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던 시기에 용감하게 상영된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은 매카시즘의 광풍이 원산지 미국에서보다도 더 극성스럽게 휘몰아쳤던 한국에서 스파르타쿠스를 일개 반란의 수괴에서 위대한 혁명가로 단숨에 끌어올리는 디딤돌 역할을 해냈다.


그런데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우리가 영화를 통해 진짜라고 믿고 있는 스파르타쿠스의 이미지는 실제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는 데 문제가 있다. 더구나 설상가상 격으로 이른바 미드로 재탄생한 스파르타쿠스는 원판불변의 법칙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는 소식이다. 나는 영화로 재해석되고, 드라마로 각색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또는 의도적으로 왜곡돼 묘사된 스파르타쿠스의 삶을 이제부터 몇 번에 걸쳐 플루타르코스의 힘을 빌려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나갈 계획이다.


☞ 북촌학당 소식지에 보낸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