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 “모든 나라 사람들이여, 아테네로 오시오” ②
플루타르코스는 아름답고 유명한 도시 아테네를 세운 테세우스와 견줄 만한 유일한 인간은 정복되지 않는 땅 로마를 탄생시킨 로물루스뿐일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단언하였다. 그는 아테네를 창건한 테세우스와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맥락에서 매우 비슷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첫째는 업적의 공통성이다. 그들은 미래에 세상에서 가장 이름 높고 영광에 가득한 국가로 발전하게 될 도시를 세웠다.
둘째는 출생의 공통성이다. 테세우스와 로물루스 모두 부모가 확실하지 않았음에도 사후에 신의 후예라는 명성을 얻었다.
셋째는 인물됨의 공통성이다. 두 사람 다 강인한 육체와 현명한 정신을 아울러 지닌 위대한 전사였다.
플루타르코스는 양자의 긍정적 면모만 포개놓는 데 머물지 않았다. 그는 로물루스와 테세우스를 교차비교하면서 아테네의 건설자와 로마의 국부가 원기와 정력이 왕성하던 시절에는 함부로 여인들을 강탈하였으며, 말년에 이르러서는 다수의 사람들과 사사건건 충돌했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이 세상에서 종적을 감췄다는 부정적 측면 역시 공유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부터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쓰여 있는 테세우스의 모험기와 성공담을 차근차근 음미해보자. “정치는 국민과 함께하는 위대한 도전과 모험”이라고 기존의 개념규정과 대조해볼 때 대단히 도발적이면서도 이단적으로 정의해놓은 나에게는 테세우스 편의 초반부는 아드레날린을 뻘뻘 분비해가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역동적 내용들로 찬연히 수놓아져 있다.
테세우스의 아버지 쪽 혈통은 아티카 최초의 주민인 에레크테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이것은 테세우스 본인 또는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의 자의적 주장일 공산이 크다. 속내를 파보면 부계 방면으로는 변변히 내세울 만한 위인이 없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아예 몰랐거나, 차마 공개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인물일 수도 있다. 플루타르코스가 테세우스도, 로물루스도 사생아였다고 서술한 대목이 그러한 증거가 되겠다.
근본 없는 놈이라는 점은 전래의 제도와 질서가 강고하게 자리 잡은 안정기에는 천형과 같은 족쇄로 작용하면서 한 인간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성의 권위와 권력이 전면적으로 부정당하기 쉬운 혼란기나 격동기에는 과감한 발상의 전환과 획기적 혁신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유용한 단초가 될 수도 있다. 상상과 창조를 가로막는 답답한 질곡 역할을 하는 낡은 상식과 해묵은 고정관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입장인 덕분이다.
대부분의 건국설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처럼 테세우스도 모친의 신원과 외할아버지의 신분은 꽤 상세히 밝혀져 있다. 외할아버지 피테우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모든 왕족들 중 제일 권세가 강했던 펠로프스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로서 트로이젠이라는 소도시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지혜와 학식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현대 한국의 기준에서 바라보자면 테세우스는 외가이기는 해도 할아버지의 재력을 일단은 확보한 상태로 태어난 셈이다.
아버지의 무관심도 뒷받침됐다. 아이게우스는 아직은 작은 촌락에 지나지 않았을 아테네로 돌아가기 이전에는 어떤 여자와도 잠자리를 같이해서는 안 된다는 신탁을 델포이에서 받았는데, 문제는 이 신탁이 모호한 표현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게우스는 유부남이었다. 현재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생기지 않자 아기를 가질 수 있는 신탁을 얻은 후 귀로에 트로이젠에 잠깐 들른 것이었다. 피테우스와 고상한 철학적 담론을 나누려는 목적에서였으리라. 즉 아이게우스 입장에서는 트로이젠은 기껏해야 잠시 지나가는 숙박지였을 따름이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피테우스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 아이게우스를 설득인지 기만인지 확실하지 않은 방법으로 꼬드겨 자신의 딸인 아이트라와 동침을 시켰다. 이러한 곡절을 거쳐 세상에 나온 아기가 테세우스였다. 피테우스로서는 결과적으로 하룻밤 외도를 저지른 격이 돼버렸고, 따라서 아이트라가 아이를 수태할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해서는 내심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사실 불륜으로 인해 혼외의 자식이 태어날 것을 걱정하기에는 그의 마음속에는 오래전부터 너무나 커다란 근심거리가 똬리를 틀어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형제가 50명이나 되는 팔라스 가문의 반란 위협에 지속적으로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정식 군대를 편성한 고대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의 씨족사회였으므로 아들의 숫자가 곧 군사의 규모였다. 형제만 무려 50명이었다고 하니 이런저런 혈연관계에 있는 다른 남자들까지 아우르면 팔라스는 어마어마한 세력을 보유했을 게 명백하다. 여기에 맞서야 하는 아이게우스는 처와의 사이에 아들은 고사하고 슬하에 딸 한 명조차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