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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로로 가는 당신에게

공희준 2015. 2. 24. 23:10

2007년 초가을 정도의 일로 기억한다. 지금은 소원하게 지내는 초등학교 동창생으로부터 들뜬 음성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 (2007년의 17대) 대선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이다. 동창생과 정말 오랜만에 의견이 일치한 터라 나도 너처럼 생각한다고 흔쾌히 맞장구를 쳐줬다.


그런데 우리는 그야말로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그는 현재는 야당이 된 당시의 집권여당이 대통령 선거에서 무조건 이긴다는, 나와는 완전히 상반된 결론을 내렸던 탓이다. 동창생이 근거로 제시한 사건은 1980년의 광주 5․18 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화려한 휴가」라는 한국영화가 수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하면서 엄청난 흥행몰이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도 광주에 대한 부채감을 나름 짙게 가져온 인간인지라 동창생의 의견을 큰 목소리로 드러내놓고 반박하지는 못했다. 허나 내 머릿속에는 충무로 영화계의 성적표가 아닌 여의도 방송가의 시청률이 훨씬 더 큰 비중과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었다.


MBC 문화방송에서 방영된 「커피 프린스」는 5인조 걸그룹 베이비복스의 막내 윤은혜를 정상급 연예인으로 등극시켜주는 발판 역할을 한 작품이다. 탤런트 공유 역시 이 트렌디 미니시리즈를 통해 조연급 연기자에서 주연급 배우로 당당히 발돋움하였다.


그런데 대단히 의미심장한 대목은 전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동시간대의 시청률 조사에서 유독 서울지역에서만 「커피 프린스」가 2등을 차지했다는 사실이었다. 서울에서의 1위 프로그램은 한국사회의 가장 살벌하고 적나라한 계급투쟁의 현장이 된 교육과 입시를 풍자적으로 해부한 SBS 서울방송의 「강남엄마 따라잡기」였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그해 대선은 수도권에서 압승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손쉬운 승리로 마무리됐다.


다시 「화려한 휴가」로 돌아가서 그 영화를 본 관람객 숫자는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의 득표수보다 200여만 명가량이 더 많았다. 800만이나 넘게 본 영화임에도 실제적 사회 흐름의 향방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작금의 분위기를 살펴보니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정치인들도, 무능하고 부패한 기존 제1야당으로는 정권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신당 창당을 추진하는 인사들도 요번에도 역시나 대거 광주로 몰려갈 기세다. 양쪽 모두 광주를 잡아야 야권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광주의 여론이 대한민국의 전반적 여론을 이끌어가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야권 성향의 사람들도 인정해야만 할 불편하면서도 객관적 진실이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소위 이불킥을 할 필요는 없으리라. 광주의 민심이 대한민국의 민심을 견인하지 못하게 된 현실은 윤리적 타락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사회경제의 구조적 변동이 낳은 자연스러운 결과물일 터인 이유에서다. 부도덕한 것들은 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이 다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광주가 더 이상은 정권을 창출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은 여기에서 후자의 범주에 해당하리라.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부도덕하지도 않은….


한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이야기됐다. 그러기에 카이사르는 세느강도 아니고, 라인강도 아니고, 다뉴브강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버 해협은 더더욱 아니고, 로마로 직행하기 위하여 루비콘강을 건넜다. 오늘날 야당 사람들의 모습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 시대에 “Again 2002!”의 신기루를 좇아 나 홀로 사하라 사막을 터벅터벅 횡단하는 꼴이다.


모든 길은 수도권으로 통하는 시대다. 그럼에도 한국의 야당은 주류와 비주류를 막론하고, 진보파인지 중도파인지 상관없이 여전히 남행열차를 거의 본능 내지 조건반사적으로 타려고 든다. 한국정치의 무게중심은 비 내리는 호남선을 진즉에 떠나서 끈적끈적한 돼지갈비 냄새가 역하게 진동하는 늦은 저녁 무렵의 경인선(또는 경수선) 급행열차에 오래전부터 몸을 싣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