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산드로스, 역성혁명을 꿈꾼 전쟁영웅 ⑤
플루타르코스는 리산드로스와 본국 간에 오간 단답식 대화는 아테네라는 거인을 쓰러뜨린 극적 효과를 증폭시키려는 목적에서 꾸며낸 허구라고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분석하고 있다. 진짜 훈령은 굉장히 장황했는데 간략히 요약하자면 아테네는 해외의 모든 식민지를 내놓고, 이후에 또다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능력과 자원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내용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멎은 다음 승전한 연합국이 패전한 독일에 강요해 체결시킨 베르사유 강화조약만큼이나 혹독하고 일방적이었다.
베르사유 조약과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부과한 항복조건의 공통점은 승자가 패자에게 무장해제의 굴레를 씌웠다는 사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나 승전국들은 패전국의 위협적 해군력을 가만두지 않았다. 양국의 주력함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면충돌한 유틀란트 해전에서 티르피츠 제독의 독일 대양함대에게 혼쭐이 난 영국이 독일에게 초대형 노급 전함을 비롯한 대부분의 군함들을 인도하기를 강제했듯이, 아테네의 빠르고 강한 삼단노선들 때문에 전쟁 내내 곤욕을 치러야 했던 스파르타는 아이고스포타미에서의 참패로 빈사지경을 헤매는 아테네에게 불과 12척의 전선만을 남기고 나머지 배들을 모두 펠로폰네소스 동맹에게 넘길 것을 요구해왔다.
리산드로스는 잔여 함대마저 빼앗아 아테네의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을 깔끔히 빼버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아테네의 방패와 갑옷까지도 벗겨내 스파르타의 오래된 강적을 한 방에 훅 갈 수 있는 연약한 벌거숭이 상태로 만들고자 아테네시를 웅장하게 감싸고 있는 단단한 성벽들을 본국에서 온 훈령대로 남김없이 허물어버릴 패자 측에 압박하였다.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잔존한 전함들을 접수하고, 아테네인들이 어쩔 수 없이 도시의 장성을 무너뜨리기로 예정된 바로 그날인 무니키온 달의 열엿새는 과거에 아테네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괴멸시킴으로써 그리스 문명의 자유와 독립을 보존한 날짜이기도 하였다. 리산드로는 아테네인들에게 최대의 굴욕감을 안길 수 있는 시점을 일부러 골랐다고 하겠다.
페르시아 군대를 패퇴시킨 다음 키몬이 기초를 구축하고, 테미스토클레스가 건설을 완성시킨 성곽이 없어지면 앞으로 아테네를 스파르타 지상군이 마치 제 안방인 양 맘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게 됨은 불을 보든 훤했다. 젊은 웅변가 클레오메네스를 중심으로 성벽을 허물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허나 여론의 힘으로 부패한 독재자를 쫓아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침략한 적군을 물리칠 수는 없는 법이다. 휴전조건을 거부한 아테네로 하여금 이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리산드로스가 보내오자 더는 시간을 끌기가 불가능해졌음을 인정한 아테네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의 손으로 성벽을 파괴했고, 이 광경을 흐뭇한 시선으로 느긋하게 지켜보던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장졸들은 철거작업이 완료되자 머리에 화환을 쓰고 춤을 추면서 그리스 세계에 자유가 되돌아왔음을 기뻐하였다. 아테네의 새로운 지배자들이 찬양한 자유란 소극적으로는 탐욕스러운 아테네의 괴롭힘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고, 적극적으로는 제각기 자국의 인민을 남들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억압하고 착취할 수 있는 자유를 뜻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일설에 의하면 리산드로스가 아테네인 전원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노예로 팔아버릴 계획을 동맹국 장수들과의 회의석상에서 꺼내기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자 스파르타 못지않게 아테네를 눈엣가시로 여겨온 테베의 에리안투스가 아테네의 시가지를 싹 밀어버리고 그 자리를 양떼를 키우는 목장으로 만들어버리자고 한 술 더 떴다고 한다. 베르사유 체제의 질곡을 히틀러의 주도 아래 간단히 깨뜨린 독일이 두 번째로 세계대전을 도발하자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모겐소는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독일 내의 모든 공장과 산업시설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그 영토를 중세시대에 존재했던 전형적인 농업국가의 풍광으로 되돌리는 계획을 입안해 미합중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베릍와 대영제국의 총리인 윈스턴 처칠 두 사람 모두의 승인을 받은 바가 있었다.
모겐소의 독일 농업화 구상은 미소 간의 냉전이 격화되면서 서독을 재무장시킬 필요성이 대두된 까닭에 유야무야되었다. 리산드로스의 아테네 유목화 기획은 포키스 출신의 한 시인의 감동적 설득과 그에 동조한 동료 지휘관들의 만류로 불발되었다고 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시리다는 순망치한의 고사성어가 웅변하듯이 아테네가 사라지면 페르시아의 침략으로부터 펠로폰네소스 지역을 지켜주는 방파제도 덩달아 사라질 것을 우려한 스파르타 수뇌부의 전략적 판단이 리산드로스의 무지막지한 계획을 무산시켰을 것으로 나는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다.
지금은 해설가로 변신한 이영표 선수는 월드컵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증명하는 자리라고 일갈하며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의 부진한 경기력을 질타했었다. 리산드로스는 아테네에 놀러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스리려고 이곳에 왔다. 그의 통치방법은 물어보나마나 무자비한 공포정치였다. 하지만 아테네는 스파르타 직할로 경영하기에는 여전히 버겁고 부담스러운 도시였다. 이럴 때에는 내 손에 피 안 묻히는 것이 상책이라고, 리산드로스는 그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대로 아테네에는 30인으로 구성된, 인접한 피레우스에는 10인으로 구성된 반민주적 정치위원회를 각각 설치하고 이들에게 설거지와 코 푸는 일을 맡겼다. 그리고 아테네의 얼굴과 같은 공간인 유명한 아크로폴리스 언덕에는 칼리비아스 휘하의 스파르타군 병력을 주둔시켰다. 나중에 아테네인들이 이 부대를 어렵지 않게 축출하는 데 성공한 점을 고려하면 상징적 차원에서 소수의 병력만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심장부에 진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테네의 정복자!” 세계적 대제국 페르시아를 일궈낸 다리우스 대왕과 크세르크세스 1세조차도 꿈에서만 누려볼 수 있었던 영광스러운 칭호를 리산드로스는 마침내 얻게 되었다. 그가 스파르타 사회에서 고래로 통용돼온 상식과 관례를 순순히 따르는 인간이었다면 이 커다랗고 찬란한 명예를 만끽하도록 허락해준 신들에게 감사하면서 조용히 여생을 마치거나, 더 큰 영예를 얻고자 다시금 무기를 손에 들었을 게다. 그런데 그가 손에 든 물건은 무기가 아닌 돈이었다.
아테네를 정복한 리산드로스였다. 그가 북동쪽 변경지방인 트라키아를 순회하자 그의 권력과 명성과 매력에 이끌린 무수한 유력자들이 값비싼 선물과 진귀한 보물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그가 머문 곳으로 찾아왔다. 귀중품 중에는 왕관도 포함돼 있었다. 리산드로스가 혈통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신분임을 익히 알 텐데도 기어이 이를 바친 데에는 보험 반, 투자 반의 동기가 기증자들의 심중에서 작용하지 않았을까?
리산드로스는 이렇게 입수한 보화들을 예전에 시칠리아에서 스파르타-시라쿠스 연합군을 통솔해 아테네군을 몰살시킨 자랑스러운 경력의 소유자인 스파르타의 노장 길리포스를 통해 모국으로 운송시켰다. 리산드로스에게 돈은 단지 수단일 뿐이었지 목적이었던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길리포스에게도 재물이 리산드로스 자신에게처럼 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오판을 저질렀다는 점이다.
견물생심의 소산이었을까? 아니면 애초부터 리산드로스가 사람을 띄엄띄엄 잘못 본 탓이었을까? 길리포스는 21세기 대한민국 정치권에서도 심심치 않게 물의를 일으키곤 하는 배달사고를 그만 저지르고 만다. 리산드로스가 스파르타의 관리들에게 전달하라고 부탁한 은화의 상당 부분을 중간에 꿀꺽해 자기 집 지붕의 기와 밑에 은닉했다가, 도착한 돈자루에 적힌 금액과 실제로 들어있는 액수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크게 나는 것을 의심스럽게 생각한 관리들에게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음습한 독직사건을 일컬을 때마다 흔히 접미사처럼 따라오는 ‘게이트’를 붙여 은화게이트라고 불러도 하등 어색하지 않을 이 추문에서 길리포스가 더욱더 커다란 사회적 공분을 산 이유는 그가 착복한 은화에 아테네를 표상하는 동물이었던 올빼미가 새겨져 있었다는 데 있었다. 즉 수많은 스파르타 장병들이 싸움터에서 낭자하게 흘렸던 붉은 선혈을 길리포스가 은화 몇 닢과 맞바꾼 격이었다.
길리포스는 리산드로스에 버금갈 스파르타의 명장으로서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온 인물이었다. 그가 시칠리아에서 아테네의 육군을 사실상 전멸시키지 않았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향방은 역사에 기록된 결과와는 대단히 판이한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이런 길리포스가 돈에 눈이 멀어 ‘영웅의 추락’을 자초하였으니 스파르타 조야를 강타했을 충격의 파문과 분노의 열기는 실로 어마어마했으리라. 스파르타는 전통적으로 엄벌주의를 시행해온지라 이런 야비하고 더러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피고인을 응당 사형에 처해 마땅했으나 길리포스가 고국을 떠나는 걸로 이 사건은 황급히 종결되었다. 길리포스를 사표로 삼아 깊이 신뢰해왔을 리산드로스 역시 엄청난 배신감에 휩싸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길리포스를 덮친 비극적 운명이 형태를 달리해 그에게도 닥칠 것이라고는 이때까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태양은 아직도 중천에 떠있었던 것이다.
☞ 「플루타르크 영웅전」 읽기 모임 2월 11일 수요일 주제는 보수파의 거두 술라의 측근으로서 공화정 로마 말기를 대표하는 군인이자 정치인인 루쿨루스(BC 118년~56년)입니다. 장소는 가회동 주민센터 건너편에 위치한 북촌학당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