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크 영웅전

리산드로스, 역성혁명을 꿈꾼 전쟁영웅 ④

공희준 2015. 2. 2. 21:11

아이고스포타미에 정박한 아테네군과 람프사쿠스에 주둔한 스파르타군 사이를 갈라놓은 바다는 유럽과 아시아를 갈라놓고 있는 바다이기도 했다. 양 대륙을 가르는 이 물길의 폭은 고작 15펄롱에 불과했다. 1펄롱(Furlong)이 약 8분의 1마일, 곧 200미터 남짓한 정도의 거리를 가리키므로 겨우 3킬로미터에서 조금 더 되는 간격을 두고서 아테네의 마지막 함대와 스파르타의 최정예 함대가 마주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고속으로 회전하는 스크루를 이용해 항해하는 것만은 못해도 노꾼들을 최대한 다그치면 눈 깜짝할 사이에 건너갈 수 있는 거리이다. 아테네군은 서서히 끓는 물속에 던져진 개구리처럼 리산드로스의 교묘한 기만전술에 매일매일 속아 넘어가 군의 생명과도 같은 경계를 소홀히 하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실책을 저지른 셈이다.


아테네가 범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실수를 리산드로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천재일우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적함의 승조원들이 무장을 해제하고 육지로 올라갔다는 전갈을 전해들은 리산드로스는 자신이 탑승한 기함의 뱃머리에 청동방패를 내걸었다. 이날의 약속된 공격신호였다.


스파르타 함대는 함장을 비롯한 병사들은 물론이고 키잡이와 노 젓는 잡부들까지도 이미 전투태세에 돌입해 총사령관으로부터의 돌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군에 총진군을 알리는 지령이 하달되는 것과 동시에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장병들은 바닷물을 통째로 뒤엎을 것 같은 우렁찬 함성소리를 지르며 전시의 군영인지 평화 시의 마을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으로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아테네군의 진지로 일제히 쇄도해 들어갔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는 스파르타 군대의 특이동향을 가장 먼저 포착한 아테네 장수가 코논이었다고 명시돼 있다. 적의 급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한 코논은 병사들에게 서둘러 승선해 스파르타군의 기습에 맞설 것을 애원도 하고, 강요도 했다고 한다. 아테네 군대에는 출정한 지휘관들이 날마다 번갈아 최고지휘관을 맡는 전통이 존재해왔다. 페르시아 전쟁 때의 마라톤 전투에서는 아리스테이데스가 이러한 관행을 무시하고 자기가 지휘하기로 예정된 날짜의 지휘권을 당시 최고로 유능한 장수로 숭상되던 밀티아데스에게 과감히 넘기는 아름다운 양보의 미덕을 발휘함으로써 수적으로 우위에 있던 페르시아 육군을 쉽사리 격멸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양보는 일종의 예외였던 모양이다. 자신보다도 능력 있는 이에게 그날의 지휘권을 양도했다는 미담을 이후로는 발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저작에서 그려진 코논의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는 정당한 지휘권을 행사하는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그는 이날 근무해야 하는 ‘당직 장군’이 아닌 비번이었던 듯싶다. 손자는 지피지기면, 즉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갈파했다. 손자의 격언은 북한의 계순희 선수가 1996년도에 미국 애틀랜타에서 개최된 제26회 하계올림픽 대회의 여자 유도 종목 48kg 이하급 결승전에서 84연승의 무패가도를 질주해오던 일본의 다무라 료코 선수를 통쾌하게 물리친 후에 내뱉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야요!”라는 승전의 소감 덕분에 한층 더 유명해진 바가 있다.


용의주도한 리산드로스였다. 그가 양군이 대치한 지 5일째 되던 날을 D-Day로 택일한 것은 이날이 아테네의 장수들 중 단연 무능한 자가 함대를 이끄는 날이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미덥지 못한 동료 장군으로 인해 마음이 불안해진 코논이 해안가에서 적진의 동태를 살피다가 이상 징후를 감지하고서 월권이라는 비판을 듣기를 각오하고 임의로 비상사태를 발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날은 군을 통솔할 권한이 없었기에 병사들은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을 테고.


불가항력의 총체적 공황(Panic)이 한때 최강임을 자부하던 아테네군을 엄습했다. 장군들도, 병사들도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면서 우왕좌왕하다가 무의미한 각자도생을 꾀하는 사태로 곧바로 이어졌으리라. 트로이의 목마에 허를 찔려 순식간에 함락된 트로이성의 광경이 이날의 그리스 함대가 보여준 추태와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적의 벽력같은 전격전에 비교적 민첩하게 대응했다는 코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180척 가운데 8척의 함선만을 수습해 키프로스로 도주하는 삼십육계의 줄행랑 작전뿐이었다. 원균의 조선수군이 왜군에게 치욕적으로 참패한 칠천량해전에서 배설과 함께 화를 면한 12척의 판옥선은 명량해전에서 통쾌한 복수극을 연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코논의 삼단노선들은 이후 아무런 설욕도 이뤄내지 못했으니, 이날의 패배는 변명불가에 재기불능의 실로 완벽한 패배였다. 도망간 8척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함선들은 변변한 저항 한번 하지 못한 채 비통하게 격침당하거나 무기력하게 나포당하고 말았다. 아테네 입장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사건은 아테네시의 수호신들을 모시는 역할을 담당한 군선인 파랄루스 호가 코논의 잔당들을 뒤따라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리산드로스는 나포한 적선들과 생포한 적군들을 밧줄로 꽁꽁 묶어 람프사쿠스로 보무도 당당하게 개선하였다. 사로잡은 적군의 무리에는 포로의 엄지를 절단하는 악명 높은 법률의 제정을 주도한 필로클레스도 끼여 있었다. 리산드로스는 포로 전원에게 열외 없이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즉시 집행하였다. 플라톤의 제자이기도 했던 레스보스 섬 출신의 그리스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가 남긴 기록에 근거하자면 리산드로스가 아테네군에게 베푼 관용이라고는 죽음에 임해서도 의연한 태도를 견지한 적장 필로클레스가 처형되기 직전에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도록 허용한 것이 전부였다.


고대의 전쟁에서는 다수의 전쟁포로를 붙잡으면 항복한 자들의 대부분을 노예로 삼는 것이 보통이었다. 리산드로스는 체포한 3천 명의 아테네군 포로들을 모두 살해해 후환을 없애는 쪽을 택했다.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증명된 아테네의 끈질긴 생명력과 놀라운 복원력을 감안한다면 그로서는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물론 리산드로스 입장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잔인한 포로 학살은 유라시아 대륙의 정반대편인 중국에서도 어김없이 자행되었다. 진나라 장군 백기는 장평대전에서 백기를 든 조나라 군사 40만 명을, 초패왕 항우는 거록에서 투항한 진나라 항병 20만 명을 각각 생매장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리산드로스가 아이고스포타미에서 거둔 승리를 “믿을 수 없도록 복잡했고, 이전의 모든 전쟁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장군들의 생명을 앗아간 전쟁이 단 한 사람의 지혜와 기민한 행동으로 단 한 시간 만에 끝났다”고 평가하였다. 그랬다. BC 431년에 시작되어 30년 가까이 끌어오면서 수많은 도시를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고대의 세계대전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1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일방적 소탕전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던 것이다. 공식적으로 종전이 선언되기에는 그 후 1년의 시간이 추가로 필요했지만, 이는 델로스 동맹의 항복조건을 둘러싼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의 소위 밀당에 지나지 않았다. 남은 1년간의 밀고 당기기가 스파르타가 원하는 방향으로 타결되었음은 두말한 나위가 없다.


아이고스포타미에서 아테네의 척추를 단숨에 부러뜨렸음에도 불구하고 리산드로스는 아테네로의 진격을 다시금 미뤘다. 그런데 그가 선택한 전략은 아테네인들에게는 직접적 침략보다도 한층 더 무자비하게 느껴졌으리라. 리산드로스가 아테네 민주주의에 강제한 사망선고가 아주 고통스럽게 서서히 죽어가는 형태의 죽음이었던 이유에서다. 그는 소아시아 일대의 도시와 섬들을 완력을 앞세워 순회하면서 그곳에 거류해온 아테네인들에게 목숨을 보전하고 싶으면 당장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위협하였다. 오래전부터 만성적 식량난으로 신음하던 아테네의 입들을 더 늘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는 들르는 도시들마다에 친스파르타 성향의 10인 독재위원회를 설치하는 작업도 당연히 빼놓지 않았다. 리산드로스는 ‘비민주적 정치국’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이 10인 위원회의 구성원들을 인선하면서 출신성분이나 재산상태와는 상관없이 철저히 자신과 코드가 맞는 인물들만을 선발해나갔다. 그리스 세계의 민주정부들을 깡그리 타도하고, 스파르타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소수의 사대주의 도당에 권력을 넘기겠다는 계획을 무력을 통해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스파르타에 반항할 기미나 개연성이 보이는 인사들은 학살 또는 국외추방의 비운을 피하지 못했다.


그가 친스파르타 괴뢰정권들로 그리스 전역을 신나게 도배하고 다닐 무렵 반가운 소식이 도착했다. 아테네의 식량이 마침내 모두 동났다는 낭보였다. 그는 적의 집에 불이 나면 기름통을 휴대하고 부리나케 달려가는 인간이었다. 리산드로스는 아테네가 위장이라면 입에 해당할 피레우스 항구를 점령해 철통같은 봉쇄정책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사람이 너무나 기쁘면 오히려 간결해지나보다. 리산드로스가 본국에 상신한 전통문에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내용이 기재돼 있었다고 한다. “아테네 정복!” 본국에서 답신으로 보낸 훈령 역시 매우 단순명료했다. “점령이면 충분!”


마치 오늘날의 인터넷 댓글놀이를 연상시키는 투의 현지 야전사령관과 본국 총사령부 간의 짤막한 서신 교환은 쥐를 잡아먹으려는 고양이가 먹잇감을 앞발로 이리저리 굴려가면서 희생의 제물을 능욕하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