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산드로스, 역성혁명을 꿈꾼 전쟁영웅 ②
리산드로스가 제독에 취임해 스파르타 함대를 통솔하게 됐다는 소식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거의 모든 왕정주의자나 귀족주의자들로부터 대대적 환영을 이끌어냈다. 웬만한 인간 같았으면 팬(?)들의 열렬한 반응에 흥분하고 고무되어 즉각 행동에 착수했겠지만, 리산드로스는 돌다리도 일단 두들겨보고 건너는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인 동시에, “전쟁은 전략이 아닌 전력으로 이긴다”는 사고방식을 철저히 준봉한 인물이었다. 그는 본영을 이오니아의 에페수스에 설치하고 병력 보충과 군수품 확보에 나섰다. 그가 특히 역점을 둔 작업은 새로운 군함의 건조였다. 리산드로스는 이를 위해 조선소를 설치하고, 상공업 진흥에 힘썼다. 농업 이외의 일체의 산업을 장려하지 않아온 스파르타의 전통적 국책을 서슴없이 내버린 조치였다.
전력으로 이긴다는 생각이 전략의 사용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력 없는 전략은 공허하고, 전략 없는 전력은 맹목적이다. 리산드로스는 착실하게 전력을 강화하는 중에서도 꾀를 부릴 수 있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어김없이 상대를 기만하는 작전을 수행하였다. 에페수스 바로 남쪽의 밀레투스에 진주한 초기에 그곳의 민주파들에게 짐짓 우호적으로 손짓해 그들을 안심시킨 다음 나중에 전원 일망타진한 것이 그와 같은 기만전술의 전형적 사례다.
스파르타인들은 헤라클레스의 후손을 자처해왔다. 그들에게는 헤라클레스의 후예들은 전쟁터에서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오랫동안 불문율처럼 통용되어왔다. 리산드로스는 이 불문율을 “사자의 가죽이 없으면 여우의 가죽이라도 대신 써야지”라고 말하면서 일언지하에 일축했다. 그가 느닷없이 공정해진 순간은 오직 공정함으로써만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때로 한정되었다.
전략 중에서도 고급한 전략의 범주에 드는 항목이 외교 전략이다. 역사에서는 동맹의 강약과 연합의 유무에 따라 전쟁의 승패의 향방이 엇갈린 경우가 빈번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전 당사자인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측 모두 전쟁기간 내내 효과적 합종연횡을 구축하기 위한 움직임을 끊임없이 시도했는데, 이러한 외교전에서는 군사 방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파르타가 전반적으로 우세를 차지하였다. 주된 원인은 양국의 핵심적 구애대상인 페르시아 제국이 스파르타의 승리를 선호한 데 있었다. 해상강국 아테네가 이기면 페르시아의 서쪽 변경지대인 소아시아 지방의 안전보장이 아테네 함대에 의해 위협받을 것이 명약관화한 이유에서였다.
외교관 알키비아데스는 지휘관 알키비아데스만큼이나 스파르타에게는 골칫덩어리였다. 알키비아데스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해온 페르시아의 태수이자 군사령관인 티사페르네스가 그의 아테네 친구의 의견을 좇아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델로스 동맹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서 전세를 관망하는 노선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로부터의 전폭적 지원을 기대했던 리산드로스는 티사페르네스의 미온적 태도에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주사위로 속이고, 어른들은 맹세로 속인다”는 이야기를 대놓고 해온 리산드스였으나, 막상 다른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탓에 이번에는 자기가 곤란을 겪어야 했다
적의 적은 동지임은 물어보나 마나다. 리산드로스는 티사페르네스와 정치적으로 불편한 관계에 놓인 페르시아의 젊은 왕자 키루스를 직접 찾아가 그를 설득해 상당량의 군자금을 빌려와 휘하 병사들의 급료를 대폭 인상해줬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는 시대였다. 스파르타군의 봉급이 껑충 뛰었다는 소문이 에게해 전역으로 퍼지자마자 그간 급료가 밀려 생계가 막막했던 무수한 아테네의 수병들이 스파르타 진영으로 대거 투항해왔다. 병사들이 없는 배는 쓸모없는 나무판때기에 불과했다. 승무원들이 탈주해 텅 빈 함선들을 씁쓸한 심정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던 아테네군 사령관들은 당장이라도 쳐들어올지 모를 스파르타 군함들의 함영을 찾으려 멀리 수평선 쪽으로 마지못해 시선을 옮겨야 했다.
적군의 사기와 군력이 급격이 저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산드로스는 알키비아데스와의 정면대결을 고집스럽게 회피하였다. 완벽한 승리의 조건이 아직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판단에서였다. 뭍에서든, 물에서든 패배해본 적이 없는 노회한 명장 알키비아데스가 여전히 아테네 함대를 영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알키비아데스는 무능하고 경솔한 안티오코스에게 함대의 지휘책임을 일임하고서는 사모스로 잠시 떠났다. 물론 함부로 교전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남긴 다음이었다. 그러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수가 있다고, 빈틈없던 알키비아데스의 사람 보는 눈이 중대한 착오를 빚었으니, 안티오코스는 상관의 경고를 무시하고 리산드로스에게 되레 먼저 싸움을 걸었다가 15척의 함선을 적에게 나포당하고 말았다.
15척 정도의 상실로 무너질 아테네 해군은 아니었다. 문제는 15척의 손실에 지나지 않는 아테네의 군사적 패배를 리산드로스가 정치적으로 대단히 영악하게 증폭시켜 써먹었다는 점이다. 리산드로스는 이 소규모 해전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세우면서 스파르타의 승리를 요란하게 선전함으로써 아테네인들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만들었고, 이는 알키비아데스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알키비아데스가 더 이상 출전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리산드로스에게는 적의 대형 삼단노선 150척을 분멸한 것과 진배없는 호재였다. 반면, 아테네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달리는 전력을 전략으로 그럭저럭 상쇄시킬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마저도 스스로 완전히 차버린 꼴이었다.
승리에 필요한 나머지 2프로를 만족스럽게 채운 리산드로스는 전후의 세계질서의 토대가 될 원칙들을 확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대영제국의 처칠 총리와 미합중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함상에서 만나 대서양 헌장에 합의한 것과 비슷한 장면이라고 하겠다. 결정적 차이점은 존재한다. 전체주의의 분쇄와 민주주의의 확산을 지향한 영미의 수뇌부와는 달리, 스파르타의 지도층은 민주정을 일소하고 스파르타식 군국주의를 여러 나라에 이식시킬 것을 목표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골자는 ‘10인 과두정치’였다. 스파르타가 앞으로 정복하게 될 아테네 등의 델로스 동맹 소속의 주요 도시들의 기존 민주주의 정부를 타도하고, 열 명의 친스파르타 성향의 요인들로 구성되는 위원회에 도시의 통치를 맡긴다는 구상이었다. 강압적 독재정치를 밀어붙일 10인 과두정의 머리위에는 스파르타에서 파견될 총독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임은 물론이었다. 리산드로스는 격렬한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한 이러한 독재체제의 원활한 착근을 도울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자기의 부하들과 협력자들에게 물질적 보상을 듬뿍 제공하였다. 사냥에 성공하려면 사냥개를 배불리 먹이는 일을 빼놓아서는 안 되는 법이다.
다른 나라의 민주정치의 파괴에 골몰했음에도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정체(政體)가 지나친 전제정치로 흐르는 사태를 막고자 주요 관직에 임기제를 시행해오고 있었다. 해군제독으로의 임기가 만료된 리산드로스의 후임자로는 고상하고 정의로운 인품으로 신망이 높았던 칼리크리티다스가 임명되었다. 리산드로스는 후임자를 당연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칼리크리티다스의 관대하고 고매한 성정이 전투에 방해만 될 거라고 본 것이다. 새로 온 장수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기는 장병들도 매한가지였다. 가히 퍼주기라도 불러도 괜찮을 두둑한 급료가 더는 나오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리산드로스는 칼리크리티다스를 조기에 낙마시키려는 의도에서 키루스로부터 빌려온 군자금을 상환한다는 구실로 쓰고 남은 군비를 후임자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이미 빈궁해질 대로 빈궁해진 주둔지의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걷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의 일이었으므로 칼리크리티다스는 바닥난 금고를 메우려면 페르시아에 손을 벌리는 것을 빼고는 별다른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그렇지만 거만한 페르시아 왕자와 콧대 높은 스파르타 신임 제독 간의 교섭이 잘 진행될 리가 없었다. 칼리크라티다스는 전비 조달에 실패하고, 얼마 후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전사하고 만다.
소아시아 서해안의 레스보스 섬 동남쪽에 펼쳐져 있는 아르기누사이 제도에서 벌어진 이 해전은 아테네가 남은 국력을 모조리 쥐어짜 어렵사리 마련한 155척의 배들로 이뤄진 함대와, 스파르타의 최신예 전함 120척이 격돌한 사건이었다. 숫자상으로는 불리했으나 질적으로 열세에 놓인 아테네 함대는 탁월한 지휘술 덕분에 뜻밖의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자멸적인 뺄셈의 정치는 이 전투 직후에도 변함없이 맹위를 떨쳤다. 전사한 병사들의 유해 수습을 소홀히 했다는 죄목으로 아테네의 500인 평의회는 기적적 승리를 조국에 선물한 8명의 장군 전원에게 가차 없이 사형을 선고하였다. 아테네는 이기고도 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해버린 것이다.
허나 이 모두는 아테네 내부 사정일 따름이었다. 어렵사리 장악한 제해권이 아테네에게 도로 넘어갈 것을 우려한 스파르타는 불길을 잡아줄 구원투수의 등판을 간절히 바랐고, 이러한 부름에 응해줄 적임자는 역시 리산드로스뿐이었다. 스파르타의 예상치 못한 패전에 당황한 동맹국들과 페르시아 또한 리산드로스의 조속한 복귀를 요청하였다. 제독직의 연임을 금지한 규정 때문에 아라쿠스에게 명목상의 총사령관 직책을 맡기고, 리산드로스는 실권을 쥔 부제독의 직함으로 전장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부제독의 지위였으되 그의 발언권과 영향력은 정식 제독의 신분이었던 지난번 임기 때보다도 더욱 강대해져 있었다. 전장에 다시금 나타난 리산드로스는 마지막 가쁜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던 아테네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버릴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비를 주도면밀하게 차근차근 해나가기 시작했다.
☞ 「플루타르크 영웅전」 읽기 모임 2월 4일 수요일 주제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도 조국에서 도편추방을 당한 아테네의 비운의 장군이자 정치인인 키몬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