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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당 깬 남자야

공희준 2015. 1. 20. 14:55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처럼 먹물 많이 먹은 사람들 사회에서 자주 인용되어온 문장도 드물 터이다. 나는 먹물은 많이 먹지 못했지만 먹물 먹은 사람들 주변에서 운 좋게 몇 년 알짱거린 덕분에 이 난해한 소리를 이제는 술술 읊을 수 있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테제를 이번에는 주어에 한번 적용해보고 싶은 충동이 샘솟는다. 21세기 한국 정치사에서 ‘주어 없음’은 한 번은 순연한 비극을, 다른 한 번은 희극적 비극을 불러왔던 까닭에서이다.


먼저 희극적 비극부터 설명해보련다. 그 악명 높은 나경원씨의 “BBK는 주어가 없다"는 억지스러운 궤변이 그것이렷다. 나는 이런 궤변의 뒷받침이 굳이 없었어도 민족의 비극이라 할 이명박 정권은 끝내는 탄생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나마 위안을 삼을 구석은 나경원씨처럼 야무지게 똑바로 생긴 입에서도 비뚤어진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 정도이리라.


다음은 본론일 순연한 비극. 협잡과 흑막으로 점철된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나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이나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민주자유당을 누가 주도적으로 만들었는지는 거의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그런데 ‘백년 가는 전국정당’의 기치 아래 만들어진 열린우리당을 어떤 사람들이 앞장서 창당했는지의 과정과 경위는 여전히 짙은 베일에 휩싸여 있다. 사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용의선상에 오른 인사들 전부가 “나는 아니다”라면서 저마다 혐의(?)를 강력히 부인하는 탓이다.


자칭타칭 친노세력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열린우리당은 천신정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현직 대통령이 울며 겨자 먹기로 신당에 참여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런 믿기 어려운 논리를 펴는 부류일수록 과거 분당 직전의 민주당에 대해서 더욱더 지독한 저주와 험악한 악담을 퍼부었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천신정 그룹의 책임이 면책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의 근시안적인 맞장구가 있었던 덕분에 열린우리당의 반反호남 색채가 효과적으로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정치에서 [전국정당이란 호남인들을 배제 내지 2선으로 밀어내는 당]을 실질적으로 의미함은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에 가깝다.


친노도 아니라고 손사래치고, 천신정도 억울하다는 표정들이다. 그러면 열린우리당은 과연 어떤 괘씸한 자들의 소행이었을까?


주어 없는 정당 열린우리당을 만든 사람은 결국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일개 백수에 불과한 나인 셈이 되겠다. 나는 살면서 부끄러운 짓을 엄청 많이 저질렀는데 그러한 부끄러운 짓거리들 가운데 단연 제일 윗자리에 와야 할 인생의 오점은 2002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에 대북송금 특검 강행과 민주당 분당 밀어붙이기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옹호한 사건일 것이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내 생명이 붙어있는 마지막 날까지 쉬지 않고 사과하고 반성하고 책임을 질 생각이다.


그런데 그때 나만큼이나 큰 목소리로 대북특검과 민주당 분당을 외쳤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현재는 오불관언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나마 침묵이라도 계속 일관되게 지켜주면 좋겠는데, 그들이 무기력을 넘어 아예 박근혜 정권의 필수구성요소가 돼버린 새정치민주연합을 대체할 새로운 야당을 건설하려는 일체의 기획과 노력들을 야권 분열 시도라 극렬하게 폄하하고 매도하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매우 역겹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감이 들 지경이다. 사람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말하는 짐승’에 불과한 걸까?


요즘 이정희씨가 멋지게 보인다. 그의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내게 후지게 다가옴에도 그가 보여주는 리더십의 스타일만큼은 아주 마음에 든다. 그는 하다못해 옛 통진당 당사 화장실의 전구가 나가도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라고 사죄할 기세로 자신이 조직의 최종 책임자임을 늘 당당하게 강조한다.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사태가 터질 때마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라거나”, “저와 아무런 상의가 없었는데요”라는 식으로 일단 오일펜스부터 치고 보는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등의 유력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면피성 자세와는 한마디로 천양지차다.


강력한 지도력은 잘한 일에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은 물론이고 자신이 이끄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범하거나 연루된 사소한 과오까지도 오지랖 넓게 사과하고 반성하고 책임지는 통 큰 태도로부터 비롯되기 마련이다. 그런 통 큰 태도는 갖추지 않으면서 본인도, 지지자들도 그저 하루 종일 남 탓만 해대니 제대로 된 권위 있는 리더십이 생겨날 리가 만무하다.


민주당은 사상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내고, IMF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했으며,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시키고, 정권재창출에도 성공한 훌륭한 정당이었다. 그런 막강한 정당을 공식적으로는 나 홀로 깨버린 형국이다. 왜냐면 민주당을 분당시키는 데 찬동하고 기여한 기나긴 주어들의 목록에는 내 이름 혼자 오롯이 달랑 남아있는 황당무계한 상황인 이유에서다.


그렇게 나는 대단한 사람이거만 잠재적 거래처들의 지갑을 여는 데에는 이처럼 고전하고 있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아내님이 내가 평소 지껄여대는 허다한 말들 중에서 가장 호소력 있고 울림이 크다고 평가한 얘기로 결론을 갈음하련다. “이게 다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