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을 끝장낸 평민 정치인 가이우스 마리우스 (최종회)
노회한 정치인의 ‘감’에는 우리가 과학으로 해명하기 어려운 뭔가가 확실히 있는 듯싶다. 로마가 새롭게 건설한 카르타고의 지사는 마리우스에게 우호적 성향을 보이는 섹스틸리우스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히엠프살의 왕국에 무사히 도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히엠프살은 마리우스의 기대와는 달리 좀처럼 도움을 주지 않았다. 주변부 국가의 통치자로서 중심부 국가의 권력투쟁에 섣불리 끼어들었다가는 나중에 무슨 봉변을 당할까 몹시 두려웠으리라.
마리우스의 자식인 청년 마리우스는 출세한 아버지의 후광 아래 세련된 화술과 정중한 예법을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배워왔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버지와 다르게 곱상한 미소년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잘생기고 매너 좋은 로마 청년에게 히엠프살의 후궁 한 명이 반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연분홍빛 기류가 감돌았고, 마리우스 부자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후궁은 그들이 로마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여러모로 편의를 봐줬다.
때마침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와 보이오티아에서 혈전을 벌이느라 수도를 비우자 로마에서는 공동 집정관인 옥타비우스와 킨나 사이에 치열한 항쟁이 벌어져 전자가 후자를 축출하고 코르넬리우스 메룰라를 킨나의 후임자에 앉혔다. 마리우스는 권좌에서 밀려난 킨나가 지방에서 병력을 규합해 로마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소수의 마우리타니아 기마병을 포함한 총인원 1천 명 남짓의 무장집단을 조직해 지체 없이 로마로 출발하였다.
목숨을 보전하고자 잠시 아프리카로 도망가 있었어도 마리우스의 인기는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는 여전히 식지 않았었나 보다. 그가 에트루리아의 텔라몬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노예와 양치기와 현지주민 등 다양한 분자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마리우스는 몰려온 무리들 중 건장하고 쓸 만하 자들을 추려내 40척의 배에 나눠 태우고 로마를 목적지로 잡고서 돛을 내렸다.
킨나의 부대에 합류한 마리우스는 킨나가 제의한 부집정관직의 벼슬을 고사하고서는 백의종군의 결연한 각오를 표시하고자 추방된 이후로 한 번도 깎거나 다듬지 않아 지저분해진 머리를 일부러 사람들 앞에 내보이며 다녔다고 한다. 초췌한 외모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리우스의 상징과도 같았던 성난 얼굴과 분노한 표정은 전혀 누그러지지도, 사그라지지도 않았고 한다.
역전의 용사 마리우스의 통솔력이 장착된 킨나의 군대 앞에서 집정관 옥타비우스의 관군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나갔다. 로마에 식량 등의 필수 물자를 공급하는 오스티아 항구를 손쉽게 함락한 반란군은 쉬지 않고 로마로 진격해 자니쿨룸 산에 포진했다.
마리우스파에 맞서기 위해서는 과단성 있는 비상조치를 발동해야 한다는 건의를 모두 물리친 옥타비우스에 실망한 술라파 병사들은 마리우스와는 견원지간이었던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친아들 메텔루스 네포스를 초빙해 그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맡기려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아들 메텔루스의 매몰찬 거절에 실망한 그들 중 일부는 마리우스-킨나 연합군으로 줄을 바꿔 탔다. 휘하 병사들부터도 버림받고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인 옥타비우스는 몸을 피하라는 주변의 충고를 무시한 채 로마에 남아 있다가 마리우스가 침투시킨 자객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엘바 섬의 유배에서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로마로 귀환한 술라는 마치 악귀처럼 보였다. 그를 수행하는 노예 출신의 호위병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아비, 남편, 또는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여인네들의 곡소리가 울려 펴졌다. 과거에 치안관을 역임한 바 있으며, 현직 원로원 의원이었던 안카리우스의 경우에는 마리우스가 그의 인사를 받지 않자마자 마리우스의 경호원들에게 현장에서 살해당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후 마리우스가 나타나기만 해도 저승사자를 만난 것처럼 벌벌 떨었다. 인사에 대한 답례의 유무만으로 생사가 엇갈렸던 탓이다.
친구 집에 은신해 있던 저명한 웅변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친구의 단골술집 주인의 고변으로 말미암아 신분이 들통이 났는데, 마리우스는 안토니우스를 체포했다는 소리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손뼉을 치면서 함성까지 질렀다고 한다. 함께 게르만족을 격퇴한 옛 동료인 전직 집정관 카툴루스 루타티우스도 마리스의 영혼을 지배하게 된 복수의 여신의 잔혹한 손길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혹여 옛정이 남아있을까 하는 요행심에 중재를 부탁한 지인이 마리우스로부터 “죽여야지”라는 싸늘한 답변을 받아오자마자 루쿨루스는 방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그렇게 무수히 죽어나간 사람들의 주검이 길거리에 함부로 뒹굴어도 누구 하나 고인에 대한 추모는커녕 그 시신을 거둘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고 한다. 사자(死者)와 한편으로 몰릴 것을 염려해서였다.
마리우스의 복수심을 대리만족시켜준 주역은 바르디아이(Bardiae)라고 불리는 그의 사설 경호대였다. 해방 노예들로 구성된 이들은 자유를 되찾아준 주인의 구원(舊怨)을 남김없이 풀어주는 것이 자기들의 천부적 사명인 듯이 살인은 물론이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부녀자를 능욕하는 악행까지도 밥 먹듯이 저질렀다고 플루타르코스는 개탄하였다. 무신의 난이 발발한 직후의 고려시대의 개경 시내를 방불케 하는 이와 같은 지옥도는 바르디아이의 행패를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킨나가 이들의 주둔지를 습격해 그 도당을 전원 몰살시킴으로써 가까스로 종식되었다.
카르타고로 향한 것이 추상적 육감의 발로였던 것처럼, 악에 바친 듯이 살생을 저지른 것도 어쩌면 자신의 시대가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는 직감의 소산일지도 몰랐다. 왜냐면 술라가 대군을 이끌고 돌아오고 있다는 풍문이 시시각각으로 신빙성을 더해가며 로마 시내로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다. 술라의 귀환이 임박했다는 소식은 로마를 휩쓸던 죽음의 광기를 잦아들게 만들었다. 문제는 이것이 폭풍우의 위력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태풍의 눈과 같은 짧은 휴지기였을 뿐이라는 점이다. 술라는 마리우스가 한 일을 언제나 방향만 바꿔서 더 큰 규모와 강도로 고스란히 재연해내는 인간이었다.
마리우스는 그의 삶에서 마지막 해의 새해 첫날에 유년 시절에 독수리 둥지에서 보았던 새알의 개수와 똑같은 숫자의 횟수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생애 7번째 집정관에 선출되는 대기록을 수립한 것이다. 둥지에 담겼던 7개의 알이 모두 부화되는 모습까지 그가 목격했었다면 마리우스는 7번째 집정관 임기를 모두 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새로운 내전의 부담과 공포를 이겨내기에는 너무나 늙고 쇠약해져 있었다. 더욱이 술라는 그가 상대해온 적수들 가운데 단연코 최강의 난적이었다. 마리우스는 그와 맞붙어서 이겨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초읽기에 내몰린 마리우스에게 심각한 과대망상과 고통스러운 불면증이 번갈아 찾아들었고, 이것들을 쫓아버릴 유일한 치료제는 술뿐이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의하면 그는 생애 마지막 집정관으로 선출되고 17일 만에, 병석에 드러누운 지 7일째에 숨을 거뒀다고 한다. 술라와의 대결에서 패할 것이 뻔했으므로 어쩌면 이런 방법이 피에 굶주린 정적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 단 한 가지 자구책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리우스의 죽음은 숨 막히는 폭압과 야만적 살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가능성을 로마의 귀족들에게 일시적으로 안겨주었다. 하지만 아들 마리우스의 곱상한 외모 안에는 선친 마리우스의 냉혈한 기질에 못지않은 야수의 본능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혈기만 왕성했지 아버지의 능력과 경륜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경험 없고 미숙한 젊은이일 뿐이었다. 지금의 팔레스트리나인 프라이네스테에서 술라의 군대에 참패해 적군에게 감금당한 소 마리우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술라는 아버지 마리우스의 무덤을 파헤쳐 그를 부관참시함으로써 마리우스 가문의 짧고도 강렬했던 권세와 영화에 마지막 대못을 박았다.
☞ 「플루타르크 영웅전」 읽기 모임의 금주 주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승리해 아테네의 짧고도 강렬했던 민주주의에 마지막 대못을 박은 스파르타의 장군 리산드로스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