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크 영웅전

공화국을 끝장낸 평민 정치인 가이우스 마리우스 ③

공희준 2015. 1. 15. 23:32

성욕과 식욕은 나이가 먹음에 따라 줄어들 수는 있어도, 권력욕은 연령이 높아진다고 해서 감퇴될 성질의 욕망은 아닐 것이다. 다섯 차례나 집정관으로 피선되었음에도, 여섯 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되려는 마리우스의 마음은 노욕의 범주를 넘어 간절함 그 자체였다.


마리우스가 과연 순전히 단순한 권력욕만으로 움직이는 인물이었을까? 플루타르코스는 마리우스를 적과의 싸움에서는 겁을 몰랐지만, 시민들과의 만남에서는 용기를 몰랐던 과거의 명장들에 비유하면서 그가 연설을 목적으로 대중 앞에 설 때마다 쩔쩔맸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마리우스의 이런 모습을 칭찬은 해줄 수 있어도 욕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민중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정치인을 권력욕의 화신으로 되레 깎아내린 것을 우리는 민주정의 타락한 형태인 중우정치를 대철학자 플라톤만큼이나 두려워했던 플루타르코스 개인의 편견의 소산으로 볼 수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전시의 마리우스가 평시의 마리우스보다 역할도, 위상도, 자신감도 월등했던 점만은 분명했다. 마리우스에게는 설상가상으로 사태를 가일층 꼬이게 만든 것은 앙숙 메텔루스의 그림자였다. 메텔루스는 비굴한 자세로 대중의 환심을 사려고 노심초사하는 마리우스와 달리 자신의 신념을 절대로 굽히지 않음으로써 소신과 원칙의 정치인이라는 평판을 꾸준히 얻어나갔다. 기실 현대 민주주의에 이르러서도 민중은 오락가락하는 진보 정치인보다는, 일관된 면모를 진득하게 보여주는 보수 정객에게 더욱 끌리기 마련이다.


개인적 악연 위에 정치적 노선의 차이까지 겹쳐진 까닭에 마리우스를 향한 메텔루스의 적개심과 혐오감은 나날이 심해졌다. 위협을 감지한 마리우스는 메텔루스를 로마에서 축출할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수립하고는 이를 현장에서 집행해줄 협력자들로 글라우키아와 사투르니누스 등을 영입했는데 이러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음모의 대가이자 탁월한 선동가들이었다.


마리우스는 이 지점에서 로마에 커다란 화근의 씨를 심어놓는다. 각종 법률을 제정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메텔루스 일파를 겁박하기 위해 원로원의 회의장에 군을 진입시킨 것이다. 유권자들에게 금품을 살포한 짓은 군대를 동원한 일에 견주면 장난스러운 애교로 여겨질 정도였다. 금력과 폭력 덕분에 마리우스는 생애 통산 여섯 번째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앞잡이인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당선되게끔 치밀하게 손을 쓰는 작업도 마리우스는 잊지 않았다. 가히 전일적 지배체제의 확립에 성공한 것이다.


마리우스는 원로원에서의 연설에서 공언한 약속을 불과 며칠 후에 시민대회에서 뻔뻔스럽게 뒤집는 교묘한 말 바꾸기로 메텔루스를 궁지에 빠뜨린다. 메텔루스는 그 역시 마리우스처럼 말만 간단히 바꾸면 위기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에도 “위험이 없을 때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인은 위험이 따를 때에도 정의롭게 행동하는 법입니다”라는 의미심장한 고별사를 남기고 집회장을 떠난다.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고, 마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호민관에 당선된 사투르니스는 한 술 더 뜨는 인간이었다. 그는 메텔루스의 신병을 집정관들의 통제 아래 둔 다음 그에게 불과 물과 집의 사용을 금지시키는 황당무계한 긴급 동의안을 시민대회의 표결에 부쳐서 통과시켰다. 쉽게 말해 죽으라는 소리였다. 몇몇 과격분자들은 그를 당장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이 메텔루스의 처지를 동정한 덕택에 그에 대한 최종적 형벌은 추방형으로 낙착되었다.


메텔루스를 쫓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 사트루니누스의 힘은 이제 그를 호민관으로 밀어올린 마리우스조차도 제어하기가 곤란할 지경으로 커져갔다. 마리우스는 사투리니누스의 월권과 행패가 도를 넘었다면서 그를 제거할 것을 종용하는 인사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이들과 사투르니누스 사이에서 오히려 줄타기를 꾀한다.


마리우스는 사투리니누스 감싸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계급의 사람들이 사투리니누스를 성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군대를 동원해 그들을 원로원 건물 안으로 몰아넣은 다음 수돗물 공급을 차단하여 굴복시켰다. 그런데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마리우스의 신변안전보장 약속은 투항 의사를 밝히고 건물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사투르니누스가 대량 학살함으로써 무의미한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마리우스의 위신과 명망은 로마 사회에서 크게 추락하였다.


이로 인해 메텔루스를 복권시키자는 여론이 고조되었고, 마리우스의 반대도 억울하게 쫓겨난 메텔루스의 명예를 회복해주자는 빗발치는 요구를 당해내지는 못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하기로는 메텔루스나 마리우스나 서로가 매한가지였던 터라, 정적의 화려한 귀환 장면을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데다가 뒤이을 보복을 염려한 마리우스는 신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구실로 소아시아 반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식의 잠정적 정계은퇴였다고 하겠다.


플루타르코스는 지금의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외유를 하고 있을 당시의 마리우스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만 장기간 공들여 쌓아올린 권세와 영광이 지속적으로 쪼그라들고 있는 상황에 대해 그가 엄청나게 초조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리우로서는 국면을 전환시킬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만 할 시점이었다.


판문점 총격요청사건을 아시는가, 또는 기억하시는가? 남북관계가 경색되어야만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자가 대통령 선거에서 유리해질 것으로 계산한 일부 불순한 세력이 북한에게 남한을 향해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은밀히 부탁했다는 천인공노할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오리무중인 채로 남아있다.


바로 이런 일을 마리우스가 획책했다며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영웅전에서 분통을 터트렸다. 마리우스가 접촉한 대상은 폰투스의 국왕인 미트리다테스 6세였다. 스포일러 삼아 미리 넌지시 귀띔하자면 로마 공화국과 폰투스 왕국 사이의 싸움은 폼페이우스에게 패배한 미트리다테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비로소 오랜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미트리다테스를 접견한 자리에서 마리우스는 로마에게 경쟁심과 공포심의 모순적 감정을 동시에 품어온 임금의 자존심을 자극해 폰투스가 로마에 선전포고를 감행하도록 부추기지만 이 정도의 잔꾀에 넘어가 나라를 망국의 위기로 이끌지도 모를 무모한 전쟁에 뛰어들 미트리다테스가 아니었다. 마리우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쓸쓸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로마로 돌아온 마리우스는 자못 황당무계해 보이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원로원 의사당 바로 옆에다 집을 짓고서 그곳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력자들이 그를 찾아오기 편리하도록 나름 기지를 발휘해본 것으로 보이나, 그의 기대와 달리 방문자의 수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마리우스가 문학과 철학과 예술을 주제로 사람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사교술 방면에서는 경쟁력이 없었던 탓이었다. 게다가 간사한 것이 세상인심이라고, 사람들은 지는 해가 아니라 욱일승천의 기세로 떠오르는 태양을 더 만나길 원했으니 지략과 노회함에서 마리우스보다도 더 마리우스 같았던 술라가 그 주인공이었다.


마리우스가 귀족에 대한 평민층의 미움을 부추겨 성공을 거뒀다면, 술라는 그런 마리우스에 대한 귀족들의 원한에 편승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두 사람 모두 뺄셈의 정치에 빌붙고 증오의 정치를 증폭시켜 부와 명성을 손에 쥔 경우였다. 마리우스의 술라에 대한 적대감은 마우레타니아의 군주 보쿠스가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인 유구르타를 사로잡았던 공로를 술라에게 다시금 확실하게 돌리는 초상을 로마에 기증한 일을 계기로 처치불능의 단계로 강화되었다. 마리우스는 특기인 정치공작을 구사해 이 미술품들을 부수려고 시도하지만, 술라의 역공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리우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심정이었으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마리우스는 술라와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심하는데 이때 새로운 전쟁이 하필이면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발발하면서 양자 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대결은 일시적으로 유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