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건은 목숨이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전자는 자유를 중시하는 부르주아 정치를 대변하는 대표적 슬로건이고, 후자는 평등을 신봉하는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상징적 문구다.
이 간단한 문장들에 담긴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다. 무수한 목숨 역시 바쳐졌음은 물론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짧은 슬로건 속에 흔히 시대정신이라고 불리는 당대 민중(인민)들의 보편적이면서 간절한 염원이 함축적이고 효과적으로 녹아있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같은 길이길이 기억에 남을 만한 슬로건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대한민국이 거의 해마다 크고 작은 선거가 치러질 정도의 ‘선거공화국’이 되어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대단히 역설적 현상이라고 하겠다. 게다기 웬만한 선거캠프에 가보면 전․현직 카피라이터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는데….
나는 조금은 색다른 데서 원인을 발견하고 싶다. 선거에서 슬로건을 짓거나 이를 활용하는 사람이 자신들의 슬로건을 스스로의 분신이나 자식처럼 생각하며 애지중지하지 않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현역 정치 컨설턴트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김효태의 [선거기획과 실행 : 노원(병 재보선 보고서(도서출판 새로운 사람들 펴냄)]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흥미로운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유감스러운 점은 그 일화가 익명으로 처리되어 있다는 점이지만.
필자인 김효태가 선거기획을 총괄했단 동네는 전통적인 야권 강세지역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통합당이 공천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전열이 흐트러지면서 해당 지역구의 야권지지 성향의 유권자들은 새로 공천을 받은 야당 후보에게 쉽게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효태가 나에게 이들을 결집시킬 ‘임팩트’ 있는 슬로건을 하나 지어달라고 부탁해왔고, 나는 “제대로 싸우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문구를 거의 즉석에서 만들어냈다. 이 슬로건은 캠프 내부에서 상당한 반발과 거부감을 샀다. 캠프를 들락거리는 노년층 지지자들의 반발이 특히 극심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골목이나 가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정치인들끼리 싸우지 말라고 한다면서 다른 슬로건으로 대체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상대적 체험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그 어디보다도 객관적 시각을 견지해야 마땅할 선거캠프에서마저도 만연돼 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하늘이 두 쪽으로 나도 새누리당을 지지할 노인층을 주로 만나고 다닐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김효태는 슬로건을 바꿔야 한다는 캠프 내의 부당한 압력(그중에는 심지어 후부의 직계가족도 포함되었다)을 뚝심 있게 견뎌냈고 그 결과 마침내 상대방 후보가 자신의 오랫동안 공들여 개발해낸 고유한 슬로건을 황급히 버리고 “(저는) 싸우지 않겠습니다”라면서 우리 측 슬로건을 따라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싸우지 않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이 뇌리에 얼마나 인상 깊게 남았는지 총선 1년 후에 노원에서 보궐선거가 치러졌을 때 안철수 후보의 사무실에 찾아온 방금 사연이 소개된 지역구에 거주하는 고령의 민주당 당원들이 대뜸 나를 보자자마 “제대로 싸우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은 나쁜 슬로건이었다고 원저자인 나에게 항의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뒤끝작렬이었던 셈이다. 나는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단지 속으로 이렇게 되니었을 뿐이다.
“그 슬로건이 그렇게 형편없이 개떡 같은 슬로건이었으면 아저씨들이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겠습니까?”
사실 그 슬로건을 지키는 과정에서 김효태는 선거사무소 안의 핵심적인 실세 인사들과 커다란 갈등을 빚었다. 그가 자기가 당선시킨 후보자와 나중에 소원한 관계가 된 데에는 내가 지은 슬로건이 톡톡히 악역 역할을 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개인적으로는 절치한 후배이도 하기에 내 입장에서는 엄청 미안한 노릇이다.
허나 나는 김효태가 선거에서의 구력은 아직은 비교적 짧아도 진짜 일류 기획자이자 전략가임을 실감했다. 자신의 ‘사회생활’을 선거에서의 승리보다도 훨씬 더 중요시하는 여느 여의도 선수들 같았으면 다른 캠프 사람들의 목소리와 분위기에 대충 영합하고 맞춰주는 편안한 길을 선택했을 것이 분명한 까닭에서다.
훌륭한 슬로건이 태어나려면 훌륭한 슬로건을 쓰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반드시 필요한 존재는 좋은 슬로건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전략가와 기획자이다. 김효태의 [선거기획과 실행 : 노원(병) 재보선 보고서 ]는 그러한 사심 없고 믿음직한 전략가와 기획자가 탄생시킨 노작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충신을 원하는 출마자들이 꼭 한번쯤 읽어야만 할 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