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교수는 강남좌파에 대해 그야말로 책 한 권을 쓴 적이 있다. 강교수가 진중권씨로부터 남을 욕하기 위해 책 한 권을 쓴 사람이라는 조롱을 들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가 강남좌파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책 한 권을 쓴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리라.
부연하자면 강준만 교수가 책 한 권을 써가면서까지 욕하고 싶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진중권 동양대 교수였고, 나는 진중권씨는 책 한 권 분량의 욕을 먹어도 싼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 관해서 고백하자면 책 한 권 분량으로 욕을 먹어야 할 정도로 나쁜 짓을 해오지는 않았다고 감히 자부하는 바이다. 설령 했더라도 아직까지는 운 좋게 들키지 않았거나.
그런데 책 한 권 분량의 담론을 접했어도 강남좌파의 구체적 이미지는 우리들 머릿속에서 좀처럼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기껏해야 현재의 야당이나 그 주변을 헬리콥터처럼 맴도는 몇몇 유명 인사들의 얼굴과 겹쳐질 뿐이다.
이쯤해서 내 자랑을 해야겠다. 어차피 사회관계망서비스, 곧 SNS의 진정한 존재의 이유는 소통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진짜 목적은 자기 자랑에 있다. 만약 페이스북이 정말 누리꾼들 사이의 소통을 도와주려는 수단으로 개발되었다면 마크 저커버거를 우리나라 돈으로 수조 원의 재산을 지닌 억만장자로 만들어주지는 못했을 게다. 소통은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을 뜻하고, 그렇다면 아마 페이스북의 서버는 거의 텅텅 비어있어야만 정상이리라.
나는 오래전부터 강남좌파를 딱 한 줄로 요약해왔다. “스타벅스에서 고급 원두커피를 마시며 「체 게바라 평전」을 읽는 인간들”이라고 규정해놓은 것이다. 스타벅스에서 값비싼 드립 커피를 홀짝이면서 고상하고 여유 있게 「체 게바라」 평전을 읽는 것은 강남좌파가 되는 과정에서 물론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본인의 모습을 이왕이면 애플의 아이폰을 이용해 촬영한 다음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때깔 나게 올려놔야만 명실상부한 강남좌파가 될 수 있는 충분조건이 비로소 확보되는 까닭에서다.
모든 개념 또는 발명품은 원래의 창작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통용 내지 소비되기 쉽다. 내가 그려낸 강남좌파의 전형적 인상은 한국의 주류 진보진영이 공허하고 관념적인 문화좌파의 틀을 깨고나와, 수많은 서민과 중산층의 절박하고 실질적인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실사구시의 집단으로 거듭나는 데에 하등 기여하지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직업이 애국인 사람들”이 야권을 공격하는 도구로 주로 악용해왔을 따름이다. 가슴 아픈 현실이다.
그렇다. 어버이연합으로 대표되는 3류 애국세력이나, 동아일보 김순덕 논설위원 부류의 독설에는 능해도 상상력은 빈곤한 대다수 보수 성향 언론인들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주류 보수는 한국의 주류 진보의 평균적 이미지를 김기종 씨와 같은 개량한복 입은 루저에게서 더 이상 발견하지 않는다. 문제는 주류 진보 진영은 일반대중이 이해하기 편하고 단박에 체감 가능한 그림에서 보수의 전형적 이미지를 찾아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등의 주류 진보매체의 만평에서 묘사하는 평균적 보수의 이미지는 일제 강점기의 고등계 형사나, 유신독재 시절의 음습한 공안검사다. 한번 물어보자. 일제 고등계 형사와 유신 시절 공안검사의 이미지를 들이대며 “얘들이 바로 새누리당 놈들이에요”라고 설명하면 국민들 중에서, 특히 20~30대 청년들 가운데 과연 몇 퍼센트나 곧장 고개를 끄덕이겠나?
왕년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왕성히 공부했다는 분들이 리얼리즘의 ㄹ자 언저리에도 가고 있지 못하니 늘 중요한 선거 때만 되면 야권 전체가 30년 전, 50년 전 이야기만 반복하기 마련이다. 정치인이든 일반인이든 역사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맞지만, 스스로 역사가가 될 필요는 없다. 강남역 근처나 이대입구의 스타벅스 매장에 앉아서 「체 게바라 평전」만 읽어도 일제 고등계 형사의 후예와 왕년의 공안검사들을 때려잡을 수 있다는 해묵은 환상에서 이제는 과감히 벗어나자. ‘사물’인터넷 시대의 개막이 코앞에 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