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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인가? 맷돌인가?

공희준 2015. 2. 22. 23:25

“꽁꽁 싸매고 나왔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뿌리 뽑힐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남편의 광적인 걸그룹 사랑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덩달아 우리나라 걸그룹들의 변천사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게 된 아내님이 S.E.S.와 핑클 등의 원조 아이돌 걸그룹들의 데뷔 초기의 활동이 담긴 영상물들을 TV나 인터넷에서 감상하고서 남긴 일종의 10자평이다.


나 역시 아내님의 투박하면서도 동시에 예리한 돌직구성의 지적을 듣고 나서야 예전의 걸그룹들이 과다노출은커녕 시청자들이 답답하게 느낄 지경으로 예의바른 복장을 하고 공연에 임했음을 새삼스럽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당시의 걸그룹들이 깊고 은밀한 속살 부근까지 아슬아슬하게 파이고, 몸매의 볼륨과 곡선을 도발적으로 훤히 드러내는 복장을 착용하지 않은 데에는 ① IMF 관리체제 전후의 우울한 사회 분위기 ② 태동기의 걸그룹 시장이 아직은 블루 오션이었다는 점 ③ 대중의 인식이 지금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다는 사실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갓 시집온 종갓집 며느리인 양 꽁꽁 싸매고 등장한 핑클과 S.E.S. 멤버들도 성인기에 접어들면서 노출 수위를 서서히 높여나갔다. 그럼에도 20대 중반에 도달했을 즈음의 그녀들이 10대 후반 또는 스무 살을 갓 넘긴 현재의 걸그룹 구성원들보다는 확연히 덜 벗고 노래를 불렀음은 분명하다.


남녀 간의 성행위 동작을 연상시키는 선정적 안무, 서 있는 곳이 무대인지 아니면 이른바 업소의 룸인지 헷갈리게 하는 야한 의상, 닥치고 “들이대는” 투의 직설적 가사는 이제는 명실상부한 한류열풍의 견인차로 번듯하게 자리 잡은 한국의 걸그룹들에게 천형처럼 따라붙는 고질적 문제점들이다.


이 해묵은 숙제를 풀어갈 해결사 역할을 승합차 안에서 새우잠을 자며 부족한 수면시간을 보충할 걸그룹 본인들이나, 우렁찬 사자후와 당장 자지러질 듯한 익룡소리를 번갈아 보내는 팬들에게 맡긴다는 건 한마디로 어불성설일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 책임은 타성과 관행에 안주해 돈을 벌고 있는 크고 작은 연예기획사들의 기획자들과 의사 결정권자들에게 돌아가야만 마땅하다.


기획자들과 의사 결정권자들 입장에서도 자신들을 겨냥한 비판에 항변하자면 아마 책 한 권을 쓰고도 남을지 모른다. 그러나 명색이 마케터나 최고경영자라는 사람들이 한창 아리따운 나이에 다다른, 대한민국에서 가장 예쁜 아가씨들을 모아놓고선 고작 카메라 앞에서 골반 흔들어대는 방법밖에는 가르쳐주지 못한다는 것은 참담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똑같은 돌을 가지고도 위대한 예술가는 불후의 조각품을 남기지만, 안목 없는 범부는 맷돌 만들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 TV를 켤 때마다, 유튜브에 접속할 적마다 맷돌처럼 부지런히 허리 돌리는 모습만 보여주는 우리나라 현역 걸그룹들을 보면서 든 단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