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크 영웅전

리산드로스, 역성혁명을 꿈꾼 전쟁영웅 (최종회)

공희준 2015. 2. 21. 18:53

스파르타인들은 전설상의 반인반신의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직계 후손을 자처해왔다. 허나 같은 헤라클레스의 후예들 사이의 관계는 결코 동등하지가 않았다. 에우리폰티다이와 아기아다이 두 가문만이 왕위를 독점해왔기 때문이다. 나머지 가문 출신의 인사들은 설령 귀족일지라도 신분 상승에 명백히 한계가 있었다.

 

리산드로스는 비할 데 없이 빛나는 공훈을 나라를 위해 세운 인물이었다. 테르모필레 계곡에서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장렬히 산화한 레오니다스조차 결국은 패장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리산드로스는 레오니다스의 목을 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대왕도 해내지 못한 아테네 정복에 성공한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특기할 만한 능력도, 업적도 없는 자들이 단지 특정 가문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유만으로 왕위에 즉위해 재주 있는 이들과, 실력 있는 이들을 되레 핍박하는 답답하고 부당한 현실에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구상한 새로운 국가상의 핵심은 명예와 공적이 있는 모든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왕이 될 자격을 주자는 것이었다. 세습이 아닌 경쟁으로 왕을 뽑으면 리산드로스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는 계산의 발로였다. 그가 이와 같은 만민평등의 사상을 품게 된 동기는 권력욕의 산물일 수가 있다. 모든 사회적 진보가 반드시 인간의 순수한 선의로 낳은 성과물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결과적으로 리산드로스가 나름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 사건을 꼭 평가절하할 일만은 아닐 것이다.

 

왕후장상의 씨앗은 따로 없다!” 진승이 진나라 말기에 봇물을 이룬 농민반란의 첫 테이프를 끊으며 내뱉은 말이다. 리산드로스는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나기 근 200년 전에 비슷한 확신에 도달하였다. 뼛속까지 무인이었던 리산드로스가 뜬금없이 변론술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기존의 왕조를 타도하려는 일념에서였다. 칼끝 대신 혀끝으로 체제를 변혁하겠다는 계획은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다수의 대중을 투명한 공개석상에서 상대해야만 하는 분야인 웅변은 어둡고 은밀한 권모술수의 현장에서 평생을 잔뼈가 굵어온 늦깎이 만학도가 전공하기에는 부적당한 과목이었던 듯싶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듯이 리산드로스는 주특기인 이면거래와 물밑공작으로 방향을 틀었다. 신령한 예언을 꾸며내 민심을 선동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과거에 신탁을 조작해 재미를 본 경험이 있었다. 디오피테스의 예언의 참뜻을 왜곡해 레온티키다스가 올라가야 마땅할 옥좌에 엉뚱하게 아게실라우스를 앉혀준 일이 그것이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검증된 방법을 채택한 셈이다.

 

뭐든지 한 번은 통해도 두 번은 통하지 않는 법이다. 더군다나 리산드로스가 국왕의 신임과 총애를 잃고서 뒷방노인 신세가 된 사실은 이미 웬만한 그리스인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였다. 델포이에 자리 잡은 아폴론 신전의 신녀들을 매수하려다 실패한 것도, 제우스에게 제사를 지내는 에페이로스에 위치한 도도나 신전의 여사제들의 협조를 구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일도, 지중해 건너편의 리비아까지 직접 건너가 암몬 신전의 신탁 관리자들을 구워삶으려다가 되레 음모가 고발당한 사건도 주된 원인은 신의 목소리를 좌지우지하기에는 현세에서의 리산드로스의 권력이 오래전에 끈이 떨어진 데에서 찾는 게 타당할 게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리산드로스는 폰투스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이 아폴론신의 아이를 출산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기에게 실레누스라는 이름을 붙여준 다음 양육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실레누스가 다수의 증인들 앞에서 이후로 스파르타는 혈통에 집착하지 말고, 훌륭한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왕을 뽑아야 한다고 명령하는 주문된신탁을 낭독하도록 만들려는 목적에서였다. 실레누스가 청년이 되었을 무렵에 그제야 실행에 옮길 정도로 장기간의 시간과 노력이 체계적으로 투자되어온 이 비장하고도 복잡한 승부수는 음모에 가담한 공모자들 중 하나가 막판에 겁을 집어먹고 발을 빼는 바람에 어이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음모의 전모는 리산드로스의 사후에야 들통이 났다고 한다.

 

아게실라우스는 리산드로스가 불충한 역심을 품어왔음을 비록 어렴풋이나마 오래전부타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정확히 어떤 말 못할 사정과 곡절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국왕은 리산드로스의 생전에는 그의 대역무도한 모반죄를 추궁하지 않았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리산드로스를 친국할 기회는 왕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소아시아에 머무르는 동안 리산드로스가 돌연히 전쟁에 나갔다가 허망하게 전사했기 때문이다.

 

리산드로스가 테베를 응징하는 전쟁의 사령관에 취임한 것은 이해할 만한 부분이 많다. 그가 아테네에 공들여 구축한 30인 과두정을 아테네 민주파가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스파르타가 차지한 그리스 세계의 맹주 자리를 공공연히 탐내온 테베의 전폭적 지원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테베의 도전과 아테네의 재기를 너무 늦기 전에 막아내려면 신속하호 단호한 군사행동이 요구됐다. 리산드로스는 바로 이런 논리를 개진해 고령에 우울증마저 겹친 자신을 사령관에 임명하도록 스파르타 민회를 설득할 수가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출발한 스파르타군은 코린트 지협을 통과해 보이오티아에 진입하였다. 스파르타의 군세에 압도된 오르코메니아 인들이 투항해오고, 레바데아를 손쉽게 약탈한 모습에서 드러나듯이 순조로운 행군이었다. 리산드로스는 스파르타의 또 다른 왕인 파우사니아스에게 편지를 보내 두 사람이 각각 인솔해온 부대를 할리아르투스에서 합쳐서 적군을 협공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전령이 도중에 테베의 척후병들에게 붙잡힌 까닭에 절대적으로 비밀에 부쳐야만 할 작전정보가 담긴 리산드로스의 서한이 적군의 수중에 입수되고 말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대서양에서 악명 높은 통상파괴 전술으로 맹위를 떨치던 독일 해군의 최정예 유보트 부대가 수세에 몰린 것도, 태평양 전쟁 초기 하와이 제도마저 석권할 것 같은 기세였던 일본 연합함대의 주력 항공모함들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몰살당한 것도 결정적 패인은 적에게 도청된 암호가 해독된 탓에 있었다.

 

파우사니아스의 원군을 목 놓아 기다리던 리산드로스의 군대를 찾아온 것은 소극적 수성 자세를 견지하리리던 당초의 예상을 깨고 별안간 성문을 열고 대담하게 벼락처럼 돌격해온 테베의 정예군이었다. 완벽한 기습을 허용한 스파르타군은 1천 명의 전사자를 뒤에 놔둔 채 황망히 도주하기에 바빴다. 스파르타에게 한 가지 좋은 소식은 스파르타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벗어나려고 험준한 산속으로까지 스파르타 군대를 무리하게 추격해오던 테베군 300명을 살상시켰다는 점이었다. 이 좋은 소식을 상쇄키시고도 너끈히 남을 나쁜 소식은 스파르타가 허겁지겁 후퇴하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전사자들의 시신들에는 리산드로스의 주검도 포함되었다는 점이었다. 점술사를 비롯한 리산드로스의 최측근일 것으로 추정되는 수행원들 여럿 역시 그와 나란히 목숨을 잃었다. 이 수행원들은 비서 겸 책사로서 오랫동안 리산드로스를 따라다녔으리라.

 

뒤늦게 부랴부랴 전장에 도착한 파우사니아스는 복수전을 촉구하는 리산드로스의 늙은 동료 장수들의 호소를 뿌리치고 테베와의 휴전을 선택하였다. 기가 오를 대로 오른 적군과 무모하게 또다시 격돌하는 것은 위험하며, 전사자들의 유해를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수습하려면 교전 중지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그가 제시한 휴전협정 필요성의 논거였다.

 

파우사니아스는 테베군의 양해 아래 찾아낸 리산드로스의 유체를 파노아이아 지방의 가장 훌륭한 명당자리에 매장했다고 플루타르코스는 기록하였다. 리산드로스의 무덤과 기념비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이 집필되던 시기까지도 의연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리산드로스는 뱀이 그를 따라와 깨물 것이란 신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리산드로스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네오코루스라는 병사는 용무늬가 새겨진 방패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공동왕 파우사니아스가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을 만치 패전의 충격은 컸다. 파우사니아스는 테게아의 아테네 신전으로 피신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다시는 스파르타로 돌아오지 못했다.

 

리산드로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할리아르투스 싸움에서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몇 가지 발견된다.

 

첫째는 전투에 임할 때 신중하기로 정평이 자자했던 리산드로스가 왜 노구를 이끌고 최전선에 섰느냐는 점이다. 그는 본부에서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짜는 데 능숙한 지장이었지, 최전방에서 몸소 적진을 유린하는 행동으로 승리를 만들어내는 용장은 아니었다. 내가 이 대목을 읽자마자 단박에 기억에 떠오른 일은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의 죽음을 둘러싼 해묵은 의혹이었다. 그는 1944720, 동프로이센의 라슈텐부르크에 소재한, ‘늑대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전시 사령부에서 발생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된 것이 밝혀지자 반역자로서 치욕스럽게 법정에 세워지느니, 스스로 자결하는 쪽을 선택한다. 아게실라우스에게 반역음모를 훤히 다 발각돼 외통수로 내몰린 상황에서 전장에서 죽는 것이 리산드로스가 명예를 보존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둘째는, 리산드로스가 파우사니아스에게 써 보낸 서신이 고의로 유출되었을 가능성이다. 더욱이 1천 명의 전사자는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당장 전쟁을 냉큼 중단해야만 할 만큼의 심각하고 치명적인 피해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공동왕 아게실라수스와 파우사니아스 간에는 모종의 거래나 밀약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리산드로스의 유해가 끝내 본국으로 운구되지 못한 결말에서 우리는 그러한 밀착과 야합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리산드로스가 죽은 다음 그의 재산내역이 공개되었다. 그가 살아서 구가한 권세와 명성과 영화가 무색해질 지경으로 리산드로스는 재산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한마디로 대단히 청빈했다는 뜻이다. 리산드로스의 유산에서 정작 중요한 자산은 그가 남긴 글과 문서들이었다. 그 안에는 한정된 집안의 구성원들만이 대대로 독차지해온 왕좌를 뛰어난 능력과 업적을 과시한 모든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활짝 개방할 것을 촉구하는 경천동지할 내용의 연설문이 들어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그의 자택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이 가차 없이 실시되었다는 의미다. 역적은 죽어도 역적이었던 것이다. 아게실라우스는 이 문서들을 죄다 세상에 공표해 리산드로스의 죄상을 낱낱이 까발릴 작정이었다. 그러자 민회 의장인 라크라티다스가 고인의 허물을 들추는 것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를 혼란시킨다는 판단 하에 왕을 만류함으로써 리산드로스는 부관참시의 화만은 겨우 모면할 수 있었다. 라크라티다스가 분노한 임금을 진정시키려고 언급한 표면적 명분은 리산드로스의 문장이 명문이라는 것이었다. 명문이면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하건만, 누구도 보지 못하게끔 오히려 영원히 덮어버렸으니 이 또한 석연치 않다고 하겠다.

 

리산드로스가 사망했을 때에 그의 슬하에는 딸들만 있었던 모양이다. 전쟁영웅에서 역성혁명가로 변신한 이 당돌하고 파란만장한 사나이도 자식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여느 필부와 다름이 없었는지 그는 딸들 전부를 스파르타 상류층의 청년들과 약혼시켰다. 예비 사위들은 미래의 장인이 사망하자마자 부유한 권문세가의 여식에서 청렴결백한 청백리의 가난한 유자녀로 졸지에 전락한 약혼녀들을 인정사정없이 내팽개쳤다. 스파르타에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결혼을 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법률이 존재해왔는데, 리산드로스의 사위가 될 뻔한 청년들은 그들 약혼녀들을 매몰차게 차버리면서 이 법을 구실로 내세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