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문재인은 향 대신 오이를 쥐었어야

공희준 2015. 2. 10. 15:35

남성 5인조 인기 아이돌 그룹 H.O.T.의 구성원이었으며, 현재는 국민보살로 칭송받으면서 연예계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방송인 문희준씨가 천만 안티를 몰고 다니는 데 톡톡히 일조한 사건이 있었다. 록커로 전향한 그가 하루에 오이 3개만을 먹으며 음악을 한다고 말했던 것이 수많은 록음악 애호가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온 일이었다.

 

록 전문가에서 트로트 작곡가로 하방해 장윤정의 어머나에 필적할 만한 대박 노래를 만들기 위해 벌써 몇 년째 칩거 중인 아는 후배의 평가에 따르면 문희준씨가 했던 록음악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있었다고 한다. 록커로 변신한 문희준한테는 그가 전직 아이돌이었다는 점이 오히려 큰 장애물로 작용했던 셈이다. 실은 내가 궁금했던 사항은 문희준 음악에 관한 비평이 아니라 후배가 심혈을 기울여 작곡중인 노래가 언제쯤 세상에 나오느냐는 점이었다. 저작권료를 공평하게 나눠먹는다는 조건 아래 내가 가사를 맡아 쓰기로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희준씨에 앞서서 오이 하나로 수많은 안티들을 일거에 창조해낸 인물이 있었다. 바로 2002년 대선정국 당시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민생현장 탐방의 일환으로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에 들렀다가 제대로 닦이지도 않은 흙 묻은 오이를 통째로 입 안에 넣고서 자신이 야성미 넘치는 짐승남이라도 되는 양 단숨에 씹어 삼켰는데 이 엽기적인 선거 퍼포먼스가 한나라당을 싫어하는 유권자들의 야유와 빈축을 사고 말았던 것이다.

 

이회창 총재는 전형적인 백면서생의 얼굴을 한 귀족정치인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를 정치적으로 도약시킨 대쪽 이미지는 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이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그가 105평짜리 대형 호화 빌라에 거주한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마른 대나무처럼 쩍쩍 갈라져 온데간데없었다. 더욱이 노풍이 정국을 강타하면서 이회창 대세론은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초라하게 쪼그라든 상태였다. 그 결과 여론조사에서 장기간 압도적 1위를 달려오던 그의 지지율은 대책 없이 추락을 거듭했다.

 

김대중 정부의 정권재창출 노력이 성공하기를 염원하던 국민들과, 한나라당의 재집권을 두려워한 대부분의 진보 성향 지식인들은 이회창 총재의 오이 폭풍흡입 사건을 조롱과 풍자의 대상으로 삼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나름 안목 있는 전문가들은 이 일을 이회창의 회심의 승부수로 여겼다. 왜냐면 가락시장에서 이회창 총재가 흙 묻은 오이를 삼키면서 보여준 모습은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코스를 밟아온 그답지 않게 소탈하고 천진난만했기 때문이다. 거의 동네 바보형 수준이었다. 이 흙 묻은 오이 해프닝은 바닥을 모르고 내려가던 그의 지지도가 반등되는 계기로 결국 작용하였다.

 

유권자들은 서민 출신 정치인보다는 엘리트 출신으로서 서민의 삶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정치인에게 더 끌리기 마련이다. 이런 유권자들을 미개하다고 탓해서는 곤란하다. 강자와 친해지면 자기도 강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 또는 착각하는 습성은 인간의 영구불변한 본능인 이유에서다. 본질적으로 정치는 사회의 구조를 다루는 분야지, 인간의 본능에 손을 대는 영역이 아니다. 야당과 진보진영 안에는 사회구조에 더해 인간의 본능까지도 바꾸겠다고 용감히 나서는 이들이 꽤 눈에 띄는데 이런 무모한 시도는 늘 참담한 실패로 귀결되기 마련이고, 이 예정된 실패는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국개론, 곧 국민개조론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취임 후 첫 행보로 이승만-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다. 선명성과 정체성을 중요하게 인식하는 야당 지지자들은 문 대표가 이승만과 박정희의 무덤을 찾았다는 소식에 크게 분개하고 있다. 나는 그들과는 확연히 입장을 달리해 문재인 대표가 전직 대통령들이 묻혀 있는 무덤을 찾아간 행동 자체가 부적절한 처사였다고 믿는다. 향기 나는 정치인은 되지 못할지언정, 향냄새 진동하는 정치인의 인상만은 어떻게든 떨쳐내는 것이 대권재수생 문재인의 긴급한 당면과제라는 판단에서이다.

 

박근혜 정권이 집권 3년차 만에 치명적 레임덕에 빠져든 결정적 원인은 서민경제가 좀처럼 회생 기미를 보이지 않아온 데 있다. 설상가상으로 박 대통령은 서민대중의 아픔과 고통을 어루만지며 본인의 부덕과 무능함을 진솔하게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호통과 불통으로 일관하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본인이 경제에 대해 매우 무지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스스로를 세계적인 경제석학으로 여기고 있을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여당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야당이 국민들에게 확실하고 구체적인 경제비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결코 허투루 놓쳐서는 안 될 절호의 기회다. 박 대통령의 장악력이 전부 상실되어 정부여당이 경제에 비교적 해박한 인물들로 새롭게 전열을 정비한 이후에는 야당이 민생과 관련된 의제들을 효과적으로 선점해가기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임이 분명하다. 양편 모두 완벽히 진용을 갖춘 다음에는 야당은 경제전선에서의 승산이 희박하다.

 

그런 맥락에서 바라봤을 때 문재인 대표가 당대표 취임 첫날의 첫 번째 공식일정으로 가야 할 곳은 죽은 임금들이 조용히 누워있는 적막한 묘역이 아니라 살아있는 백성들이 시끄럽게 북적거리면서 노동하는 공간이어야만 했다. 문 대표는 가락동의 농수산물 시장에서 흙 묻은 오이를 우걱우걱 삼키며,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이 총체적으로 파탄시킨 민생경제를 야당이 책임지고 살려내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피력했어야만 옳았다. 정권을 진짜로 잡고 싶거들랑 앞으로는 손에 향불 대신에 오이를 잡기 바란다.